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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는 잘 있습니다 Aug 21. 2020

결혼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글로 쓴 자화상

'출발했니? 감자전 해놨어. 동생도 와 있다'

나는 문자메시지를 길게 눌러 오른쪽으로 밀어버렸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지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나는 오늘 같은 마음이 드는 날이면 집 앞 카페로 향하곤 했다. 골목 안에 자리해있어 사람도 붐비지 않고 음악마저도 내 취향인 곳. 카페 안에는 혼자 온 듯 보이는 서너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트리 장식을 보니 12월 25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늘 그렇듯 창가 자리에 앉았다. 큰 나무가 보이고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이는 자리. 여기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배경음악으로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직원이 카페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틀어놓은 것 같았으나 캐럴이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나는 아래로 아래로 점점 더 침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카페 안을 둘러보니 내 오른쪽으로 안경을 쓴 여자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손이 책 표지를 가리고 있어 제목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충 ‘결혼’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이었다. 결혼. 그녀 또한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던 찰나, 시끄러운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으나 소리의 진원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핸드폰은 몸을 벌벌 떨어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신 전화 엄마'

나는 진동이 멈출 때까지 코트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어두려 했으나 내 손을 벗어난 그 안에서 소음은 더 격렬해졌고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진동이 멎기를 기다렸다. 가까스로 불을 끄고 오래 지나지 않아 곧바로 또 다른 진동이 이어졌다. 아까부터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하던 책 읽는 여자는 안경을 추켜세우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등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페 진동 벨이었다. 나는 서둘러 카운터로 뛰어가 언제 폭발할지 모를 소음 덩어리와 평화롭게 국화잎이 둥 둥 떠 있는 찻잔을 교환했다. 자리로 돌아오니 그 사이 핸드폰에 문자가 와 있었다.

'언니 언제 와? 주운 아빠가 소개해 준 사람 만나봤어?'

나는 이번에도 문자를 길게 눌러 오른쪽으로 밀어버렸다.



지난 주말에 동생 남편의 직장 동료라는 사람과 선을 봤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주말마다 선을 보고 있었다. 주선자는 엄마, 아빠, 그게 아니면 엄마 친구, 또는 아빠 아는 분일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엄마 친구 아들인 '엄친아'를 소개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서 제부의 동료라던 그 사람의 얼굴, 이름은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였고 우리가 주고받았던 말들조차 나는 담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동생과 할 말이 딱히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그날 내가 입었던 옷에 묻은 빨간 얼룩과 유쾌하지 않았던 그날의 분위기,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내가 느꼈던 공허함뿐이었다. 참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멀리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면 의례적으로 물어봐야 하는 질문과 대답만을 주고받았다. 형식적인 웃음이 우리 둘 사이를 오고 갔고 우리는 그렇게 그 자리를 버텨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사람과의 만남은 그 전과 조금 달랐다. 결혼이라는 과제와 부모님에 대한 불만을 성토하는 자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한 말 중에는 나에게 선명한 자국을 남긴 것도 있었다.

"그냥 두면 알아서 할 텐데. 왜들 그렇게 유난일까요?"



오늘 아침 식탁에서 나는 아버지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불쑥 내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너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자다가도 너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 내 친구들은 손자가 벌써 둘이다."

제발 밥 먹을 때만큼은 그런 이야기는 좀 안 했으면 했다. 그때 옆에 앉아 조용히 국을 뜨고 있던 엄마도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보라며 한술 얹었다. 엄마 아는 사람의 딸도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서. 엄마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렇게 삐딱 선을 타고 있었다. 네, 알겠어요. 하고 좋게 넘어가면 되는 건데 나는 그만 짜증스럽게 대답해버렸고 아침 당직이라 출근을 빨리 해야 한다는 핑계로 바로 집을 나와 버렸다.

아침에 먹은 밥이 얹힌 탓인지 오전 내내 불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더부룩한 속 때문에 점심도 걸렀다. 대신 아침에 느꼈던 감정들과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남자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하며 배를 채웠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불안한 건 나다. 나는 지난번 맞선 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두면 알아서 할 텐데. 왜들 그렇게 유난일까요?


점심을 거른 탓에 허기가 졌으나 이 시간에 다른 식당에 가서 배를 채우기는 귀찮았다. 조각 케이크 하나면 딱 일 것 같아 나는 쇼윈도로 향했다.

"주문하시게요? 바나나 케이크랑 당근케이크가 제일 잘 나가는데. 그걸로 준비해드릴까요?"

직원이 선반 제일 위, 가장 중앙에 놓여있는 케이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들은 장식부터 색감까지 나의 시선을 확 끌었고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여러 등분으로 잘라 놓고 팔았는지 이제 두 조각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보다는 제일 구석에 자리한 희멀건 케이크에 더 마음이 끌렸다. 생크림도 초콜릿 장식도 없는 그것이. 종일 사가는 사람이 없었는지 칼로 조각내어 자른 흔적 하나 없이 오븐에서 나왔을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케이크 앞에는'세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아니요. 제일 안 팔리는 건 뭐예요?"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네?"

"오늘 제일 안 팔린 거요. 그걸로 주세요."

내 예상대로 직원은 그 하얀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직원이 케이크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달라고 했을 때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것부터 이 케이크를 떨이처럼 취급하며 원래 가격보다도 낮게, 다른 케이크보다 천 원이나 싸게 판 점까지도. 나는 케이크가 어떤 맛일지 궁금하여 포크로 한 입 크기만큼 그것을 찍어 입에 넣었다. 맹숭맹숭한 맛이지만 은은하게 단맛이 느껴졌다. 지금 마시고 있는 국화차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세입 째 먹었을 때 문득 카페 벽면에 붙어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들꽃이 풀밭에 피어있고 나비가 들꽃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그리고 밑에 또박또박 적혀 있는 나태주 시인의 시까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방금 마신 국화차 한 모금이 번지면서 마음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국화차로 목을 축인 들꽃이 꽃잎을 활짝 펼치자 나비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듯했다. 들꽃의 잔잔한 향을 아는 나비가.



‘바빠? 아침에 엄마가 한 말 생각해봤어? 거기에 상담 신청해놨으니까 너한테 전화 갈 거야.’

'듀 × 김은숙입니다. 상담 원하신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연이은 문자메시지 세례에 진동을 무음으로 바꾸고 가방에 넣어버렸다. 듣기 싫은 소리, 생각하기 싫은 것들 모두 이렇게 무음 모드로 돌려버리고 무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혼에 대한 압박감까지도.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남들이 다 하니까? 외로운 게 싫어서? 사회 통념을 거스르고 살 자신이 없어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후손을 남겨야 하니까? 힘든 일을 함께 이겨 내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한다 하자. 그럼 행복할까?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들은 모두 해피엔딩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고 끝이 나는 이야기들. 그러나 나는 해피엔딩이 어디까지인지 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대요./ 여기까지. 그 후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그때 안경을 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읽던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보던 책의 표지로 재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궁금했던 제목의 조각이 자리를 찾퍼즐이 완성되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정말 결혼은 미친 짓일까?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책을 카페 서재 틈바구니 속에 대충 끼워 넣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카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녀가 가고 난 뒤, 나는 잠시 멈추었던 생각하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카페 안에 사람이 나를 제외하고 한 명이 남았을 때쯤 나는 마음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결혼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은 거라고. 내가 꼽은 행복으로 가는 선택지 중 1번에 결혼이 있다. 나는 그래서 결혼이 하고 싶은 거였다. 그러니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행복해지는 것보다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는 결혼이 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결혼하기도 쉽지 않다. 인연을 만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니까.



소개팅은 최소 백번은 해야 인연을 만날 수 있어, 라던 친구의 말을 응용하면 나는 선보기를 몇 번 더 해야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하루가 지나면 기억조차 못할 남자 앞에 앉아 의미 없는 대화들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는 몇 번이나 더 분홍색 원피스와 하얀 블라우스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고 갈아입어야 하는 것일까? 선을 볼 때면 나는 마치 7년 전 병아리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어색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면접관 앞에서 나를 선택해주세요 하던 그때로. 숨 막히는 작은 방에는 오로지 피 면접자인 나와 면접자인 그 사람만 존재하고 나는 그에게 선택받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그러나 피 면접자 또한 면접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면접과 선은 조금 다르다. 선은 쌍방향 면접이다. 또, 선은 면접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오늘 처음 본 외계인을 내 행성에 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그러고 보면, 선이라는 것이 결혼을 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으로 통용되는 점은 참 이상한 것 같다. 낯선 이와 평생을 묶일 결심을 한 남녀가 마주 보고 앉아서 공통된 관심사를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컴컴한 망망대해 속을 뜰채 두 개로 기약 없이 수색한다. 나는 그렇게 선으로 만나 지금까지도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 부모님이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대충 나와 비슷한 조건의 사람과 만나 사랑이란 과정을 생략한 채 날짜를 잡고 번갯불에 콩 꿔먹듯 결혼하기는 싫다. 누군가 말했다. 결혼을 한 후에 감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결혼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 아니었나? ‘머리 했어요? 잘 어울려요.’,  ‘그걸 보니 당신이 생각났어요.’처럼 사소하지만 가슴 떨리는 말로 시작하여 그를 서서히 내 마음에 담으며 그 사람을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사랑. 그래, 나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사람도 그런 생각이 들었대.”라던 친구의 말처럼.

 


 이제 정말로 서른 중반이다. 결혼한 친구들이 이야기한다. 네 나이가 마지노선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봐. 모임에 나가봐.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 남자는 거기에서 다 거기야. 다 똑같아. 그렇게 고르고 골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도 행복하지 않은 건 다 똑같아. 미안, 나 너무 염세적이었지?

희망적인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해봐.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어? 네가 바라는 배우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상상해. 그럼 나타날 거야.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그럼 너에게서 향기가 날 거고 그 향을 맡고 그가 올 거야.

또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작 넌 어떤 여자가 되고 싶은지, 어떤 아내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결혼에 대한 생각이 두서없이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 때, 카페 안을 가득 채우던 캐럴이 멈추고 마감을 알리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벌써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구나. 시계를 보니 11시. 동생네도 가고 부모님도 잠들었을 시간. 나는 썰물이 빠져나가고 난 후의 풍경을 생각했다.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감자전. 그녀는 집에서 해 먹으면 맛이 안 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 엄마께 감자전을 해 달라 했다. 엄마는 손맛이 들어가야 한다며 믹서도 쓰지 않고 강판에 감자 서너 개를 갈다가 또 손을 베었을 것이다. 동생네가 가지고 온 빨래 더미가 우리 집 세탁기 속에 가득 차 있을 것이고 냉장고 안의 반찬들은 텅텅 비었을 테지. 조카가 헨젤과 그레텔 놀이를 한다며 집안 곳곳에 떨어뜨린 과자 부스러기를 늙은 부모님은 허리를 굽혀 줍느라 어제보다 늦게 누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은 아마 모레쯤 세탁물을 가지러 다시 오겠지. 해외 출장을 마친 제부와 함께 조카와 반찬통을 안고. 나는 그날 다시 이 카페에 오게 되면 아까 안경을 쓴 여자가 읽던 책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읽어 보리라 생각하고 코트를 입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동생은 행복할까? 내게 결혼해라 결혼해라 하는 엄마는?

또다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이 시작되려고 했다. 결혼한 그녀들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결혼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관해. 그때 영업이 종료되었다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쟁반에 다 비운 접시와 찻잔을 놓으며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이 하고 싶은 건 맞지? 현실적으로는 결혼보다 인연을 찾는 게 먼저고? 그나저나 내 인연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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