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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Mar 11. 2024

1년 전 오늘,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다

- 필리핀살이 1년을 돌아보며...

1년 전 오늘,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다     

필리핀에서 살기를 작정하고 탄 비행기였다. 정확히 1년 전 오늘이다.


이쯤에서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아니 나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1년이라는 세월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오늘이 가기 전 노트북 전원을 켰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마닐라행. 그리고 필리핀살이.

왜 하필 필리핀이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코로나 대란이 끝나갈 무렵 스스로 유학을 원해 필리핀으로 먼저 날아온 중학생 막둥이. 그 덕분에 나도 누구처럼 한 달 살기를 작정하고 막둥이 하숙집에 왔다가 두 달을 더 머물고, 이후 한국에 돌아간 지 3주 만에 아예 필리핀에서 살 작정을 하고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     


1년을 살아내 보니, 우연도 아니고 운명의 장난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내가 살아갈 인생의 과정 중 꼭 필요한 변곡점에 내가 서 있었다는 것, 그 장소가 한국이 아닌 필리핀이어서 더 수월하게 나다움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반백 년은 한국에서, 새로운 반백 년의 시작은 필리핀에서...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음력 설날, 해질 무렵 산책길에 만난 행운의 무지개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영어 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저 귀가 조금 더 열리고 더 많이 뻔뻔해졌다는 것, 눈치가 조금 빨라진 것은 덤이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라는 지론이 제대로 먹혔다. 언어의 장벽, 경제적 곤궁, 남편 없이 아이만 데리고 살아가는 외국 살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자세로 버티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지나갔다.     


혹자는 팔자 편한 여인네로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쯧쯧, 기러기 아빠 생활하느라 남편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냐며. 그럴 땐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궁상스런 모습으로 비치지 않아서 그 얼마나 다행인가 여기면서 말이다.     


처음 2달 동안은 1.5룸의 마닐라 한복판 콘도에서 유학생 1명을 포함해 3명이 복작거리면서 살았다. 더위와 매연, 고물가의 마닐라를 벗어나 이후 카비테라는 인근 지역에 집을 구해 자리를 잡았다. 지대가 높아 서늘하고 무엇보다도 숨통이 트이기에 좋은 곳이다. 첫여름 방학, 어학연수를 위해 이 지역을 찾는 학생들의 홈스테이를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겨울 시즌을 준비하며 그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공항 픽업 서비스 알바를 시작으로 여행 가이드 일을 배웠다. 여행사 소속 가이드로 일한 지 1달 만에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복잡하고 뒤가 깨끗하지 못한 여행사 소속 가이드 일이 내게 맞지 않았던 것. 죽으란 법은 없다고 겨울 방학 어학연수 학생들을 케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게 이 나라 성수기 시즌이 지나갔다. 비수기의 시작인 3월, 이제는 간간이 여행 손님들을 치르며 여름 시즌을 준비하는 중이다.     


내 방 창밖 풍경, 일출 직전의 하늘





길고도 짧은 1년의 세월.

그동안 여백의 시간을 독서와 사색, 약간의 끄적임, 달리기와 트래킹, 중`단거리 여행 등등으로 채웠다. 또 앞서 세례를 받은 막둥이의 뒤를 따라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나 홀로 여행, 피나투보 화산 트레킹



“버텨내느라 수고했어. 

그리고 참 잘했어. 

미련은 갖지 마.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잖아. 

1년 전의 너와 지금의 너는 분명 달라졌어. 

더 단단하게 여물어가고 있어. 

지금처럼 그렇게 또 새로운 1년을 시작해 보는 거야.

겁내지 마. 언제나 그랬듯이.

언제나 너를 응원해. 그리고 많이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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