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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논 Oct 12. 2021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 직원으로 산다는 것은

#1. 미디어는 중소기업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어중간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을 전전한 지 벌써 5년. 대기업은 고사하고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들과 서서히 연봉 격차가 벌어지는 중이다. 좋소라는 멸칭까지 등장했는데, 지금 중소기업 돌아가는 꼴을 보면 최소 10년 이상은 이 말이 쓰일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는 중소기업 근무자다. 법인이 아닌 자영업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합산하면 압도적인 수치다. 하지만 사회에서 직장인을 대표하는 무언가가 진행될 때는 수가 적은 대기업과 공무원을 디폴트로 삼는다. 얼마 전, 대체공휴일 이슈가 나왔을 때 철저히 배제된 5인 미만 사업장이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미디어로 사회생활을 접한 사회초년생이 중소기업에서 느끼는 괴리를 많이 들었다. 세련된 풀 정장, 인맥과 정치를 중요시하는 근무환경, 열띤 회의 풍경 등은 한 사무실에 최소 100명 이상이 근무하는 규모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모든 사원을 다 합쳐 20명 남짓한 규모의 회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2. 문제는 CEO야, 바보야! 


지금까지 만난 중소기업 직원들은 정신적으로 피폐한 경우가 많았다. 고용주 자체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인 까닭이다. 대기업 직원에게도 정년과 노후의 압박은 있겠지만, 중소기업 직원들의 걱정은 그보다 더 가까운 미래에 있다. 당장 내년, 내후년의 미래조차 불안하고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노후란 너무나 먼 이야기다.


중견기업 이상만 되어도 ‘오너리스크’가 중대사로 작용하지만 소기업과 중소기업은 매일같이 오너리스크가 찾아온다. 회사가 작아서 피해 규모도 크지 않아 조명받지 않을 뿐이다. 특히 소기업은 대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실무진들이 옆에서 틀린 방향이라고 지적해도 절대 듣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영업이면 모를까, 기획이나 마케팅, 구매부터 인사 등등은 당연히 대표보다 실무진이 전문가다. 그들이 아이디어 회의를 길게 해 내린 결과를 단순한 감으로 반려하는 경우도 많고, 이미 구닥다리인 내용을 여전히 진리인 것처럼 믿으며 그 생각을 도통 바꾸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실패를 메꾸는 건 당연히 직원들이 희생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소기업과 중소기업이 여전히 그 규모에 머물러 있는 결정적 이유다.

   

소기업은 더 심하다. 모든 CEO들이 자신의 회사를 더욱 성장시키는 데 뜻이 있지 않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현실은 그러하다. 큰 회사로 발돋움하는 것보다, 현황 유지에만 집착하는 소기업은 의외로 적지 않다.


이런 회사가 생기는 이유는 딱 한 가진데, 어차피 대표는 타격이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늘 달고 사는 ‘회사가 어렵다’는 말은 직원들에게 쓸 여윳돈이 없다는 뜻이지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자차를 법인으로 돌려 세금을 감면받고, 적은 노동으로 근로소득 이상의 돈이 들어오는데, 당신이라면 위험을 감내하면서 굳이 회사를 키울 필요를 느끼겠는가? 소기업에서 중소기업 대표는 의외로 이런 소시민이 많다.


#3. 인건비와 복지가 개선되지 않는 근본적 이유


단순히 오너리스크만으로 끝나면 차라리 낫다. 이들에게 인건비는 아깝고 불필요하게 나가는 돈에 불과하다. 당연히 회사가 어려우면 인건비를 1순위로 줄일 생각을 한다. 애초에 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함부로 줄일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 인건비가 얼마나 거슬리는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중소기업의 초봉은 회사 규모와 관계없이 2400~2800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연봉협상도 대개 100~200만원 선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성과를 크게 인정받으면 500만원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봤다.) 당연히 그 연봉선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람을 소모품처럼 갈아 끼워야 한다.

 

실제로 인터뷰를 했던 어떤 회사는 오히려 직원이 오래 다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봉을 2년 간격으로 동결시키는 게 아닌 이상, 매년 돈을 올려줘야 하고, 이는 자연스레 회사 재무상황 악화에 일조한다는 의견이다. 20년 이상 운영된 중소기업이어도 근속 10년 이상인 직원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말한 부분과 연결해 보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대표가 쥐고 있고, 실무진은 자잘한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니, 비싼 돈을 주고 능력 있는 사람을 쓸 필요가 없다. 같은 일을 처리할 거라면 차라리 싼 값에 신입을 들여오는 게 효율적이다. 사람을 오래 쓸 생각도 없는 주제에 조금만 가르치면 퇴사한다고 투덜거린다. 


경력직이 나간 자리에 신입을 뽑고, 2년이 지나면 마찬가지로 그들도 퇴사. 이를 반복하는 덕분에 중소기업 대표들은 “잘해 줘 봤자 소용없다”는 핑계를 만든다. 정말 잘 챙겨 줬다면 애초에 직원이 나가겠냐는 질문은 통하지 않는다. “네가 회사 운영해 보면 안다”같은 말 같지도 않은 답변이 돌아올 뿐이다. 일을 능숙히 처리할 사람이 없어 고통받는 남은 사람들은 덤.


이런 근무환경이라 중소기업 근무자 상당수는 애사심이 없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커리어를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하고 3년 남짓한 경력을 쌓아 이직하려 한다. 대기업 이직 시장에서 3년은 경력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중소기업 이직 시장에서는 한 직장에서 5년 경력이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상황이 생긴다.


서로 언젠가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왕래도 적은 편이다. 물론 회사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멀어질 사이라지만, 미디어에 흔히 나오는 동료애나 경쟁의식도 찾기 어렵다. 높은 사람들에게 아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여기보다 좋은 회사는 널렸고, 그보다 갑인 위치로 이직하면 어차피 바뀔 위치이므로 당연하다.


#4. 이 말은 함정입니다.


중소기업 면접을 보면 꼭 걸러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여기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함정이다. 배울 것이 없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왕 배울 거라면 더 크고 체계적인 곳에서 시작하는 게 훨씬 낫다. 가르쳐줄 사람도 더 많다. 체계가 없는 중소기업에서는 다양한 일을 하는 것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하느라 중구난방으로 일을 터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력을 가지고 이직을 해도 때에 따라선 물경력 소리를 피하기 힘들다. 


나만 해도 그렇다. 기자에서 홍보팀으로 이직했고, 당연히 언론홍보 담당자로 입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작아 홍보팀과 마케팅팀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언론홍보가 아닌 미디어 마케팅이 주 업무가 됐다. 그런데, 나는 마케터로 성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언론계에 뜻이 있던 사람이고, 불찰이 있어 홍보팀으로 이직했을 뿐이지, 그렇다고 마케터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에서 일을 배운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내 절친한 친구 중에선 디자이너로 입사했지만 CS 경력까지 같이 쌓고 있는 사례도 있다. 중소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흔한 일이다.


#5. 나도 그 탐브라운 셔츠가 갖고 싶었어.


대기업이 아니라고 해서 꼰대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요즘은 젊은 꼰대가 더 문제다. 인간관계 마찰은 어딜 이직하든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업무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다녀야 할 메리트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 휩싸이게 되면 큰 자괴감과 함께 자존감까지 떨어진다. 명절 및 새해 전날 조기퇴근, 백신 휴가, 재택근무도 중소기업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다. 연말 성과급이나 상여금, 인센티브 등은 바라지도 않는다. 야근수당은 고사하고 저녁 식대가 9천원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근로자들이 태반이다. 돈이 필요해 야근수당을 노리고 일부러 야근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상대적 박탈감이 들 수 밖에.


본인은 람보르기니를 타고 다니고 탐브라운 신상 셔츠를 샀으면서, 인건비 120만원이 없다고 신음하는 CEO를 만난 적 있다. 그는 어차피 안내 데스크 직원이 할 일은 뻔한데 그만한 돈을 줘야 하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최저임금 인상을 욕했다. 당연한 노동의 가치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폄하되는 것. 대한민국 중소기업 직원으로 산다는 건, 이런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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