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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길 Oct 23. 2021

스포던트가 알려준 메시지

학생선수 그리고 나

연수(가명)가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인 연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의 체육수업을 듣는 학생이어서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지만 약간은 망설이는 연수의 태도에서 ‘부탁하려 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수는 평소보다 더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선생님, 대회에 나가려고 하는데 학교장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대요. 어떻게 해야 해요?”

연수의 질문을 듣는 도중 아차 싶으면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올 것이 왔다!’

 

작년은 코로나19가 찾아온 덕에 학교체육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많은 활동이 축소되고 연기되었다. 그중 하나가 학생선수와 관련된 업무였다.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모든 대회가 연기되고 취소되었기 때문에 작년에는 학생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등록해 대회에 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학교 운동부가 없는 학교이기에 클럽 소속의 학생선수가 없으면 당연히 학생선수와 관련된 업무는 없는 것이었다. 작년이 그랬다.

 

올해도 작년과 비슷할 거로 생각했지만, 대회들이 열리기 시작했고 우리 학교에도 출전하는 선수가 생긴 것이다. 생각을 가다듬고 연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운동했어?”

연수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학 가려고, 작년부터 운동하면서 대회 준비했어요.”

연수는 태권도 품새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클럽 소속의 학생선수는 태권도 품새 종목의 선수가 많은 편이다. 대부분의 학교 운동부 태권도부는 겨루기 중심이기에 품새 종목은 클럽 소속으로 대회를 출전했다. 그리고 품새 종목 선수들은 초등학교부터 전문선수로 훈련받기보다 태권도에 관심 많은 학생이 대학 진학을 위해 대회를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임 교에서도 담당했던 학생선수가 태권도 품새 종목 선수여서 이런 상황들은 알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인지하고 업무처리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연수가 이야기했던 학교장 확인서로 끝날 일이 아녔기 때문이다. 우선은 클럽 소속 학생선수의 연간 활동 계획서가 필요했고, 이를 근거로 대회를 출전하고 보충학습을 진행해야 했다. 특히, 최저학력에 미달하였을 때는 별도로 기초학력 보장프로그램도 운영해야 했다. 단 한 명의 학생선수라도 있으면 이러한 과정을 어김없이 거쳐야 했다. 학교의 모든 업무가 그렇듯 해당하는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지가 중요했다. 올해 우리 학교 학생선수는 연수 혼자였다.

 

단 혼자여도 꼭 필요한 학생선수 활동 계획서를 만들기 위해 연수에게 물어봤다.

“연수야 공부는 어느 정도 하지?”

연수는 실망했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부 못해요. 선생님, 알면서 물어보는 거죠?”

사실 나는 연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내 체육수업을 듣는 학생이고, 남들보다 조금 더 쾌활하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 이상은 깊이 아는 게 없었다. 솔직히 나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학생선수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학기 초 학생선수를 조사할 때 연수가 미리 찾아왔으면 더 빨리 알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연수의 소속 클럽에서 학생선수로 미리 등록을 해둔 덕분에 대회 출전이 가능했고, 최저학력 기준의 충족 여부가 중요했다. 그래서 연수에게 공부를 어느 정도 하는지 물어본 것이었다.

 

연수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불안한 마음으로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하는지 살펴봤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국어, 영어, 사회 과목에서 해당 학년 해당 교과별 평균 성적의 30% 이상을 득해야 하는데 연수는 국어와 영어 과목에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교과별로 20시간씩 기초학력 보장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다. 프로그램을 이수하기 전까지 대회 출전이 제한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연수에게 이번 대회에 출전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연수는 한참을 생각한 뒤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그럼 그거 이수하면 다음 대회는 나갈 수 있는 거죠?”

연수와 나의 새로운 관계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수는 e-school을 활용해 기초학력 보장프로그램을 충실히 이수했다. 다행히 다음 대회에는 무사히 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회 출전을 할 때마다 e-school을 활용해 보충학습도 성실히 수행했다. 연수는 첫 대회를 최저학력 기준에 막혀 출전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나 또한 연수를 더 자세히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학기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연수에게 수행평가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시험도 최선을 다해 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오랜 시간 깊이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는데 연수는 마음에 두고 있었던지 먼저 찾아와 이번 학기는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했냐고 물어왔다. 아쉽게 한 과목은 충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 과목을 충족했다고 계속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하자 연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연수의 미소를 보니 영화 속 한 장면이 생각났다. 영화 <글로브> 속 충추 성심학교 야구선수들이 경기에 졌어도 해맑았던 미소. 아직은 부족하지만, 내일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차 있는 그런 미소. 연수의 미소가 겹쳐 보였다.


영화 <글러브> 속 충주 성심학교 야구선수들

 

영화 <글로브>는 충추 성심학교 청각 장애인 야구선수들이자 연수와 같은 학생선수들의 이야기이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들이 학생선수로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풀어내고 있는 이 영화는 체육 과목을 가르치며 학생선수를 지도하는 나에게 적잖은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말을 하지 못해도 비언어적으로 의사소통하며 누구보다 야구를 즐기는 영화 속 충주 성심학교 야구선수들의 모습은 실제 사례였기에 더욱 와닿았는지 모른다.

 

이 영화가 갑자기 생각난 건 연수의 미소 덕분이었다. 미소 속에 묻어있던 노력의 의지는 실력 차이가 커서 콜드게임 패를 당했어도 내일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영화 속 야구선수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대회에 나가지 못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모습은 학생선수가 지녀야 할 가장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자세였다.

 

연수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승패에 결과보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연수가 아직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고 있어도 괜찮다. 연수는 e-school을 통해 스스로가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대회에 입상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연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을 즐기는 스포던트(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학생선수)로서 더 노력하고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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