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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May 28. 2021

창문 앞에 둥근달이 찾아왔다.

(둥근달을 보면서)

아내와 수채화를 끝내고 돌아온 시골집, 오후 아홉 시가 다 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도 늘 쫓기며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밤 아홉 시가 되어야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나기 때문이다. 얼른 씻고 이층 서재로 올라갔다. 의자에 앉자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다. 밝은 빛이 웬일인가 했더니 하얀 달이 이층 방에 찾아왔다. 휘영청 밝은 달은 아니어도 앞동산 위의 둥그스름한 달이 무단으로 창문을 넘어온 것이다. 창문 너머 어둑한 산은 보이지 않고 자그마한 도랑물 소리만 들려온다. 이웃집 닭도 웬일인지 조용하다. 온갖 동네일을 참견하는 동네 멍멍이들도 오늘은 입을 다물고 있다.


달, 둥근달이 하늘 높이 걸린 것이다. 계수나무가 자라고 있는 달이 찾아온 것이다. 한없는 그리움을 주고, 꿈을 주었던 오래 전의 밝은 달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그 달이다. 새해 농사철이 시작된다는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꿈과 희망을 주는 달이었다. 언제나 성스럽고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박한 둥근달이다. 동네 사람들이 둥근달을 먼저 보려 소란스럽다. 아이들은 깡통에 불을 담아 빙빙 돌리며 들과 산을 누빈다. 어머니는 시루떡을 하시느라 종일토록 바쁘시다. 쌀을 빻아야 하고 팥고물을 준비해야 한다. 큰 솥에 떡시루를 올려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만 남았다. 


적당한 불 조절을 해가면서 불을 피우면 한참 지나 기차 가는 소리가 난다. 떡이 거의 익어간다는 소리이다. 떡이 익으면 접시에 담아 부엌과 장독대 그리고 대청마루와 우물가에 놓고 절을 하셨다. 무엇을 그리도 많이 비셨는지 한참을 엎드려 계신다. 남은 떡은 이웃집에도 나누어 줘야 한다.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에 떡을 주고받는다. 정성이 가득한 이웃 간의 정이 오고 가는 정월 대보름 풍경이다. 아버지는 대청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계신다. 여전히 말씀이 없으시다. 왜 그리 말씀이 없으셨을까? 두고두고 의문이 생겼지만 세월이 흐른 후,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음이 아쉬기만 하다. 어머니는 떡 한 접시를 아버지께 우선 드린다. 아무 말씀도 없이 떡만 잡수시는 아버지, 아직도 눈에 선한 그리움이다. 


정성 들인 떡잔치가 끝나면 동산에 떠오르는 달을 맞이해야 한다. 한시라도 먼저 보려면 산등성이에 오른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에 올라 이곳저곳에서 불을 피우며 떠오르는 달을 기다린다. 드디어 달이 솟아올랐다. 무엇이 그리 간절한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 한참을 엎드려 무엇인가 빌어 본다. 나는 무엇을 빌었을까? 어머니는 무엇을 그리도 처절하게 기도했으며,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셨을까? 궁금하지만 끝내 여쭈어보지는 못했다. 짐작하건대 가족의 안녕 말고 무엇을 빌었을까? 시골집에서 달을 보고 정월 대보름날을 맞이하는 달에 관한 추억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중학생이 되었다.


세계인의 관심 속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올랐다. 인류 역사에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달을 보고 절을 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빌던 달에 사람이 간 것이다.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방아를 찧는 달에 사람이 간 것이다. 달에 대한 생각은 엉뚱한 사건(?)으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오랜 세월 수많은 추억이 담긴 그 달이 창문 앞을 찾아온 것이다. 달을 보고 절하던 시절, 친구 집에 찾아갈 때는 길잡이가 되던 달이었다. 서늘한 가을이 찾아왔다. 추석이 온 것이다. 먹을 것이 적당하지 않던 시절, 풍성한 추석절이 돌아온다. 먹을 것이 많은 시절에 추석이 돌아온 것이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송편을 빚고 닭을 잡으며, 운이 좋으면 돼지고기까지 먹을 수 있다. 거기에 운이 더 좋으면 추석빔을 얻어 입을 수 있다. 옷소매에 코를 닦아 땟국물 묻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얻어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부모님의 타는 속은 알 길이 없고, 오로지 먹거리와 입을 거리만 생각하게 하는 추석이 온 것이다. 거기에도 둥근달이 빠질 수 없다. 밝은 달이 찾아오는 날, 추석이 왔고 대처에 나간 친구들이 찾아왔다. 새 옷으로 멋을 부린 동네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모두가 신선한 충격을 주는 모습이었다. 


추석 즈음이 되어 달은 밝고 사람들의 발길도 바빠졌다. 면 소재지에 이동 영화관이 설치되고 동네마다 노래자랑이 벌어진다. 부모님을 졸라 영화를 봐야만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면소재지로 출동한다. 하얀 포장으로 막아 놓은 영화관에 입장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개구멍을 이용하다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일 년에 두어 번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네마다 노래자랑이 열리고 여기에도 참여해야 한다. 콩쿠르대회라는 노래자랑이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자칫하면 타 동네 사람들과 싸움도 한판 벌어진다. 모두가 달이 뜨는 밤에 이루어지는 연례행사이다. 밝은 달이 있어 이루어지는 시골 동네의 추억거리이다. 


오래 전의 많은 추억을 소환해주는 밝은 달이 창문을 넘어 찾아왔다. 상쾌한 기분에 만난 달이 정겨워 우두커니 바라본다. 앞 산 위에 홀로 선 달도 나를 바라본다. 흐른 세월에 변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부모는 어디에 계시고, 세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묻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삶도 변하고, 마음마저 변했다며 할 말이 없어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을 찾아 그리도 헤매며 살았는지도 물어본다. 말없이 바라봄에 지쳤는지 한참을 바라보던 달이 산을 넘어가려 한다. 조금 더 있어주면 오래 전의 추억이 주섬주섬 더 생각날 것 같은데 발길을 서두른다. 잠깐 사이 밝은 달은 앞동산을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도 그렇게 빨리 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훌쩍 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달이 아쉬움만 남겨놓고 훌쩍 떠나버린 봄날 저녁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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