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엔 삶의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깊어 가는 가을, 가을이 쏟아지고 있다.)

by 바람마냥

가을이 성큼 다가온 시골집, 아침 공기가 서늘하다. 반짝이는 햇살이 찾아온 반가운 아침이다. 하얀 서리를 머리에 인 낙엽송이 바람에 일렁인다. 가을까지 군살이 가득하던 앞산도 서서히 쇠잔해진 몸이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할 준비인가 보다.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찾아온 오전 시간은 늘 산뜻하다. 군살이 빠진 앞 산너머로 온 햇살이 시골 동네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서서히 하얀 서리가 뒷거름질 할 때쯤,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라 비탈길을 내려갔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찬 바람을 이기려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야 했다.


숨을 고르며 달려가는 들판에 가을 색이 뚜렷하다. 서늘한 바람이 찾아온 넓은 들판은 쓸쓸함이 오고 간다.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곡식을 키워냈던 들판이다. 곳곳엔 모든 것을 주고, 남은 껍데기까지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널따란 들판 곳곳에 나뒹구는 곤포(梱包) silage다. 추수가 끝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름은 생소하다. 볏짚을 가지런히 말아 비닐로 포장해 놓은 것이다. 족히 500kg는 된다고 하는 梱包silage, 기발한 인간의 묘수였다. 보관할 장소는 부족하지만 가축은 길러야 했다. 곤포사일리지가 가을 들판에서 대변해 준다. 가을 끝판을 수놓은 곤포 sliage가 여기저기에 가득한 들판이다.

가을 들판의 전경

곡물이나 볏짚을 운반하거나 저장하기 쉽게 압축해 놓은 것이 곤포(梱包) 요, silage는 곡물이나 볏짚을 밀폐된 공간에서 발효시켜 만든 가축용 숙성 사료를 뜻한다. 곤포 사일리지란 볏짚을 압축해 만든 곤포를 밀봉해 만든 가축용 사료이다. 梱은 가지런히 할 곤이요, 包는 포장한다는 뜻이니 가지런히 싼다는 뜻 이리라. 보관장소를 확보하지 못하는 농촌에서 사료를 저장하고 발효시키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다. 곳곳에서 하얀 모습으로 추수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있다. 여름을 달구었던 들판에 추수의 껍데기들이 널려있다. 수수를 수확한 수수 대가 쓸쓸히 서 있고, 김장용 배추밭이 하얀 흐트러짐으로 가득하다. 붉음을 한껏 불태웠던 고추밭이 허전함을 안고 있다.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 도착한 시냇가, 여기도 군살을 덜어냈다.


갈대와 억새가 가득하던 시냇가, 가끔 찾아오는 바람만 있다. 찾아온 바람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조용히 일렁이며 가을을 확인해 준다. 푸름은 어느새 누름으로 변했고 넉넉한 몸집도 군살을 덜어냈다. 여름내 부자였던 시냇물도 가을을 타나보다. 한껏 줄어든 수량에 콸콸대던 소리가 졸졸거림으로 변했다. 가을 소리로 변신한 냇가엔 아기 오리들도 나왔다. 엄마 오리를 연신 바라보며 먹거리를 찾는다. 고개를 든 어미 오리, 혹시 하는 마음에 연신 두리번댄다. 어미가 쪼르르 물 미끄럼을 타자 새끼들이 뒤따른다. 멀리엔 누런 갈대가 바람에 몸을 비비며 흐느낀다. 하얀 억새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냇가의 풍경이다.

나들이 나온 새끼 오리

긴 제방을 따라 자전거길은 푸름이 가득했었다. 길을 따라 커다란 벚나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하얀 꽃 속에 잔치가 일렁이고, 곳곳에 나들이 객들이 넘치던 곳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다. 서늘함이 주는 가을 풍경이다. 들녘엔 역시 곤포 사일리지가 가득하다. 저렇게 많은 것을 누가 먹을까도 궁금하다. 곳곳에 있는 축사가 쉽게 대변해 주는 시골, 곳곳에는 공장도 눈에 보인다. 소규모의 공장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한동안 뜸했던 자전거길이 변한 시골을 알아볼 수 없다. 널따란 들판에 축사가 들어서고, 녹음진 산골짜기엔 공장이 우뚝 섰다. 쌀농사가 주를 이루던 농촌이 순식간에 변함을 알게 한다.


마실 나온 암탉과 수탉 한쌍이 논길을 거닌다. 먹거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지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어느 집에서 마실 나왔는지 알 길이 없다. 길 고양이라도 만날까 염려되지만 말을 듣지 않으니 행운을 빌어 본다. 길고양이가 뛰고, 들개가 뛰어노는 들판에 닭도 한몫하려나 보다. 가을 문턱까지 돼지감자 꽃이 가득했던 제방도 허전하다. 어느새 꽃을 지우고 겨울준비를 서두른다. 때늦은 들깨를 터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하나라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정성을 다한다. 여름내 땀 흘린 열매 한 톨도 소홀할 수 없어서다. 간간히 보이던 할머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냇가에도 가을은 가득하다.

널찍한 들판에 자리 잡은 정자는 할머니들의 놀이터였다. 가끔 고구마도 나누고, 더러는 찐빵도 나누던 정자가 홀로 앉아있다. 지나는 먼지만 덜렁 들어앉았다. 바람만 오고 가는 들판, 할머니들이 엄두가 나질 않았으리라. 가끔 말동무되어 한나절을 놀고 갔던 시골 정자였다. 아들 자랑에 신이 났던 할머니, 동네로 이사오라던 할머니가 궁금하다. 썰렁한 가을바람을 잘 견디어 내시고 봄날의 만남을 기약해 본다. 도라지 꽃이 아름답던 근처 밭에도 가을 준비에 바쁘다. 아름다운 보랏빛 꽃이 눈에 아른거린다. 얼른 자리를 털고 페달을 밟는다.


가을이 지날 무렵, 진빨강 꽃을 피우고 잠자리와 놀던 코스모스도 볼 수 없다. 어느새 검게 변한 꽃대가 물끄러미 서 있다. 꽃이 진 자리엔 씨를 달고 바람을 탄다. 가을 끝까지 꽃을 달고 가을을 노래하던 코스코스다. 진빨강이 있는가 하면, 분홍으로 분장한 꽃도 있었다. 누런 벼가 익어가는 시골길을 환장한 모습으로 비치어주던 코스코스다.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꽃들의 춤을 잊을 수가 없다. 하나같이 일렁이며 가을을 노래하는 모습, 어린아이들이 모여 춤을 추는 그림이었다. 보여 줄 것을 다 보여주고 서서히 겨울을 맞이하려는 모습이다. 내년의 봄을 기약하는 코스모스 길이 그리워진다. 썰렁한 바람만이 지나는 길이 되었다.

가을을 노래하던 코스모스, 내년을 기약해 본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를 바람이 가로지른다. 오늘도 어김없아 맞바람이다. 언제 뒤에서 불어주는 바람이 오려나 또 기다리게 한다. 앞으로 나가기가 힘겹지만 마지막 근육의 힘을 빌려본다. 가까스로 언덕을 올라서자 따사한 햇살이 들판에 내려왔다. 구름 사이로 비추는 강렬한 햇살이 가을이 왔음을 알려준다. 작은 도랑물이 반짝이며 되받는다. 야트막한 언덕엔 뽑다 남은 배추가 어지럽다. 봄부터 가을까지 농부의 애간장을 녹인 배추다. 짓궂은 가을비가 농부 가슴에 한을 남겼다. 새봄에는 옹골찬 배추를 기대하며 페달을 밟아본다. 가을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이 그리운 계절이다. 서늘한 바람을 뚫고 가야 따스한 커피 한잔의 여유가 기다린다. 가을을 듬뿍 담은 커피 한잔이 더 그리워지는 자전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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