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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Mar 03. 2022

대지는 벌써, 온 봄을 눈치채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 뜰앞의 영산홍)

올 겨울 추위는 지난겨울과는 달랐다. 지난겨울엔 추위가 한꺼번에 왔다가 순식간에 가 버렸다. 올 겨울엔  추운 날씨가 오랫동안 심술을 부리고 있다. 많은 눈은 아니었지만 간헐적으로 자주 내렸다. 눈을 쓸고 나면 또 오고, 쓸고 나면 또 오는 골짜기였다. 눈이 오는 중에도 추운 날씨는 여지없이 계속되었다. 눈이 쌓이면 푸근함이 보통이었지만 앞산은 한껏 움츠리고 미동도 없었다. 작은 도랑도 얼어붙어 작은 입만 내밀고 오물거린다.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잔디밭도 녹은 눈이 얼어붙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겨울이었다. 서서히 겨울이 물러가는 듯하더니 슬쩍 뒷걸음질이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오더니 눈이 한바탕 춤을 춘다. 앞산도 하얀 눈을 쓰고 아직 겨울임을 알려주고 있다. 눈을 쓰고 있는 나무들, 가끔 바람만이 찾아오는 산 손님이다. 그렇게도 울어대던 산새들도 오간데 없고, 짝을 찾아 울부짖던 고라니도 흔적을 감추었다. 동네를 가로질러 길을 내던 공사판도 숨을 죽이고 있다. 비탈밭에는 지난가을의 흔적이 역력하고, 가을을 수놓았던 국화도 흔적만이 가득한 시골 동네다. 아직도 비탈밭에는 농부들의 시름이 담긴 흔적이 가득하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책임질 가을배추 이야기다. 

바위틈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비탈밭을 가득 메우고 자랐던 가을배추다. 조금은 높은 지역에 위치한 시골이라 고랭지 채소가 주를 이루는 골짜기, 가을이면 배추농사로 들썩이는 동네다. 배추를 심어 김장을 팔고, 절임배추로 재미를 보는 동네다. 일찍이 한파가 몰아닥쳤다.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배추는 꼼짝도 하지 못한 늦가을이었다. 한참 자랄 무렵에 온 한파는 비탈밭을 허탈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직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시골 동네다. 농부들의 시름이 가득 담긴 비탈밭이 허연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모두 봄이 어서 오길 기다리는 골짜기다. 언제나 봄이 찾아올까? 긴 겨울을 지나는 골짜기에서 기다려 보는 봄소식이다. 할 수 없이 벌써부터 미뤄온 마당을 정리하기로 했다. 갖가지 가을 흔적을 지워 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을 가득 수놓았던 구절초, 하얀 꽃의 흔적만 지우고 남겨 놓았다. 잔디밭 가장자리가 허전할까 구절초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언제 그 흔적마저 지워버릴까를 고민했었다. 허전함이 잦아들 무렵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골짜기에 하얀 눈이 내렸다. 마음마저 푸근한 아침이었다. 서둘러 사람이 오가는 길에 눈을 치웠다. 눈 치우는 일을 지체하면 이웃집에서 얼른 치우기 때문이다. 눈을 말끔히 치우고 나니 잔디밭에만  눈이 쌓여 있다. 갑자기 겨울이지만 겨울 같지 않은 따스함은 무엇 때문일까? 산바람이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수북이 쌓인 눈이 주는 훈훈함이었다. 하루를 즐기고 이틀이 지나자 하얀 햇살이 찾아왔다. 하얀 햇살은 수북이 쌓인 눈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하라는 뜻인가 보다. 

영산홍이 봄을 알았다.

눈이 지워지고 난 자리에 구절초 흔적이 가득하다. 고고하던 하얀 꽃이 사라진 구절초, 검은빛으로 변한 잎이 안쓰럽다. 왜 아직도 남겨 놓았을까 조금은 후회스럽다. 하양에 고고함을 가득 안고 있던 구절초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서다. 왜 그것을 몰랐을까? 고고한 구절초의 품위를 지켜주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구절초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선 골짜기, 찬 바람이 몰아친다. 구절초의 흔적이 지워짐을 서러워하듯이 바람이 드세다. 마음을 다잡아 구절초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낫으로 자르며 잔디밭 가장자리를 정리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속엔 숨소리가 들렸다. 쉬지 않고 있던 대지는 벌써 봄이 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구절초 밑으로 자리한 꽃잔디, 어느새 푸름을 내 보이고 있다. 여기에 나도 자라고 있다는 오기 같았다. 누렇게 잎이 말라죽은 줄만 알았던 꽃잔디였다.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여기 꽃잔디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외치고 있었다. 수북이 쌓였던 눈이 민망할 정도의 푸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서서히 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꽃잔디 옆으로는 영산홍이 자리를 잡았다. 초봄이면 시골집을 붉게 물들이는 영산홍이다. 꽃잔디에 뒤질세라 영산홍도 벌써 알아차렸다. 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작은 꽃망울을 얹고 고개를 들고 있다. 푸르른 하늘을 꽃꽂이 바라보고 있다. 골짜기 눈을 치우며 겨울을 가라 하지만, 대지는 벌써 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꽃잔디도 푸름을 먹었다.

골짜기에 바람은 언제나 찾아온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산바람, 가을의 흔적들이 집안으로 데려왔다. 각종 낙엽이 집안으로 날아든 것이다. 곳곳에 몰려와 배수구에도 가득하고, 잔디밭에도 널려있다. 오랜만에 뒤뜰 청소를 하던 중 만난, 황겹매화도 푸름이 역력하다. 줄기를 따라 푸르름이 가득 물들었고, 가지에는 벌써 잎을 준비하고 있다. 푸르름을 가득 먹은 황겹매화 옆에 자리한, 사철나무도 힘을 얻었다. 느긋한 푸름이 어느새 파릇한 푸름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어오던 골짜기가 어느새 봄 냄새로 가득한 것이다. 작은 텃밭이지만 햇살 가득한 날을 잡아 봄 준비를 해야겠다. 텃밭에 퇴비를 내야 하고, 밭을 갈아야 하겠다. 뜰에 있는 대추나무와 감나무도 손을 봐야겠다. 


서둘러 밭을 돌봐줘야 상추를 심고 토마토도 심을 수 있다. 거기에 가지를 심고 또 고추를 심어야 한다. 일 년 내내 즐거움을 주는  없어서는 안 될 텃밭 식구들이다. 손녀의 먹거리가 되는 방울토마토를 넉넉히 심어야겠다. 노랑과 푸름이 섞인 토마토에 주황색 토마토를 심어야 더 아름답다. 일 년 동안 마음에 풍요를 주고, 아내의 자랑거리인 뜰앞의 채소밭이다. 봄이 오면 서서히 취나물이 얼굴을 내밀 테고, 아직도 남아 있는 시금치가 불쑥 올라올 것이다. 추운 곳에 견디기 힘든 감나무와 대추나무, 겹겹이 옷을 입혀 겨울을 감싸 놓았다. 어서 나무에 옷을 벗겨 시원한 봄바람을 맞게 해 주어야겠다. 봄 준비를 하고 나면,  봄비가 내리고 땅속으로 봄이 스며들어 대지는 어느새 푸름으로 물들 것이다.  작은 도랑도 살을 불리며 봄 노래 소리로 골짜기를 메우면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가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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