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채소밭에 색을 칠하다.

(시골살이의 즐거움, 노르웨이에서 만난 풍경)

by 바람마냥

집 뒤편으로 자리한 서너 평의 거대한(?) 밭에는 구석으로 감자가 꽃을 피웠다. 지난봄, 창고에 두었던 감자를 뒤적여 보니 곳곳에 싹을 틔워 놓고 심술을 부리는 듯했다. 감자를 버릴 수는 없어 고민을 하던 중, 어렸을 적 어머님이 하시던 감자 농사가 떠올랐다. 감자가 싹이 난 부분을 정성스레 오린 후, 밭 구석에 고랑을 내어 정성껏 심어 놓았다. 그 위에 풀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닐을 씌우고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열심히 물을 주었다. 하지만 감자는 소식이 없고 애꿎은 물만 주는가 했는데, 어느 날 두둑이 불쑥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두둑을 파 보았더니 감자 싹이 조용히 밀고 올라왔고, 곳곳에 싹이 나와 소란을 피우고 있다. 신이 나서 물을 주고 보살핀 결과 이제는 꽃을 피우고 제법 그럴듯한 감자밭이 되었다.


엊그제 찾아온 손녀와 함께 호미를 들고 감자줄기를 살짝 파 보았다. 감자 밑을 살짝 파는 순간 깜짝 놀란 것은 그 밑에 많은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살며시 한 개를 따서 보자 제법 그럴듯한 감자가 되어 있었고, 감자를 얇게 썰어 불에 익혀 먹어보는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손녀는 남은 감자를 캐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가까스로 달래어 감자가 커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언젠가 감자가 알을 불리면 손녀를 불러 감자를 캐는 날을 잡아야 하겠다.

거대한 밭 안쪽에는 지난해부터 터줏대감 시금치가 감자 옆으로 거만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겨울을 그 자리에서 견디어 냈다는 자부심으로 무엇보다도 거만스럽지만 비타민, 철분 등 많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니 그냥 봐주는 수밖에 없다. 이른 봄에 찾았던 모종 상회에서 아내는 근대 씨앗을 사 왔던 모양이었다. 작년에 뿌리고 남은 아욱과 근대를 뿌려 놓아 아욱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이어서 근대가 부지런히 싹을 틔워 텃밭이 그득해졌다. 검푸른 아욱은 건새우와 된장이 곁들여지면, 문을 닫고 먹는다는 아욱국이 될 것이고, 싱싱한 근대는 겉절이로 태어 날것이니 벌써부터 여름날이 풍성해진다.


누가 뭐라 해도 여름이면 쌈채소가 제일 아니던가? 모종 상회에서 사 온 갖가지 상추와 쑥갓이 쌈채소의 대세인지라 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스무 포기 정도의 갖가지 상추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몸집을 불려 밭고랑을 채웠고, 그 옆에 자리한 쑥갓도 이에 뒤질세라 키 빼기를 키워 채소밭의 정경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쑥갓이 어지럽게 자라나는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옆엔 치커리가 가느다란 줄기를 키우며 바닥을 덮고 있다. 헐렁하던 밭이랑이 이것저것으로 그득해졌고, 거기에 골고루 쌈채소의 향이 더해져 거대한(?) 채소밭이 울창해 소란스럽다.

언젠가 지리산 여행을 하면서, 인월을 지나 실상사를 보고 정령치 마을을 내려오다 푸짐한 곰취를 놓고 파는 모녀를 목격했었다. 처음에는 곰취인지 몰랐지만 오래전에 정선장을 들러 만났던 곰취 생각이 났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소주를 한 잔 권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잔을 마시고 나니, 더덕을 고추장에 푹 찍어 안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맛을 보고 맛있다고 하며 바라본 옆엔 곰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기에서 곰취를 사다 먹은 기억에 얼른 곰취를 산적이 있다. 이런, 저런 추억이 젖어보려 올해는 곰취를 길러 보기로 마음을 먹고 시장에서 곰취모를 열 포기 사서 심었지만, 시름시름 앓다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몇 포기를 사다 다시 심자 신통하게도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상추와 쑥갓 그리고 치커리가 있고, 옆으로 곰취가 곰살맞게 자리를 잡았으며, 근대와 아욱이 궁합을 맞추는 사이 어느새 감자가 꽃을 피웠다.


감자꽃이 우습게 보였는지 쌈채소 향기의 향연을 주던 당귀가 여름내 채소밭에 향을 쏟아낸 후, 어느새 키가 껑충하게 자라 하얀 꽃을 피우며 향을 쏟아내고 있다. 당귀 뒤에 심어진 더덕은 기어이 새싹을 피워내고 기어오를 무엇만 있으면 줄기를 감고 기어오르며 향을 쏟아낸다. 여기저기에 삐쭉이 내민 더덕 줄기가 뒤 울을 그득히 메워주고, 사이사이에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두릅나무가 앙칼진 가시를 달고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이렇게 자그마한 밭 구석구석에 다양한 채소를 심은 것은 채소를 먹기보다는 작은 새싹이 나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이다. 하지만 멋진 예술쟁이인 농부가 신기해 어림도 없는 재주를 부리며 흉내를 냄이 쑥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고 들여다보는 아내가 신기해하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자 감히 씨를 뿌리면서 가꾸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 행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