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를 기르며, 스페인서 만난 풍경)
아침, 저녁으론 아직도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는 조금은 높은 곳에 살고 있다. 해발 279m, 가까운 청주에 벚꽃이 지면 이곳 낭성, 전하울엔 이제야 벚꽃이 피려고 꿈틀거린다. 마을 전체가 계곡을 따라 아래쪽으로 향하며, 울타리에 둘러싸인 것처럼 아늑해 보인다고 해서 '전하울'이라 하는 작은 동네이다.
집을 마련하던 몇 해 전,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도로 양 옆으로 싱싱한 국화가 사열을 하듯이 도열해 있고, 그 사열단이 열렬히 박수를 칠 무렵이면 야트막한 우측 산언덕에 층층 계단에도 푸릇한 국화 군단이 가지런히 앉아 물개 박수를 치고 있다. 작은 원두막이 수수한 모습으로 길손을 맞이하는데, 가슴을 억누르며 동네로 다가가면, 이제는 작은 도랑을 건넌 밭에 다시 국화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아름다운 동네 '전하울'에 들어서게 된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는 좌측의 야트막한 산에는 푸름을 가득 먹은 산자락이 하늘까지 닿은 듯이 높다란 곳에서 아래로 줄달음질 쳐오고, 곳곳엔 깨끗하게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속삭이고 있다. 넓은 산비탈엔 이름 모를 농부가 그려놓은 푸르른 들판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면, 이에 뒤질세라 산골 바람이 이마의 머리털을 뒤쪽으로 휘날려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열중쉬어 자세로 근엄하게 자리한 마을 회관이 자리하며, 길을 더 올라 가면 골짜기 곳곳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곳곳에 자리한 집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듯이, 골짜기 곳곳에는 검푸름이 가득 고여 아래 마을로 줄달음질 쳐 '전하울'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길을 되짚어 내려와 위쪽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면 조용한 전원주택들이 자리하고 있고, 산길을 따라 자그마한 길이 그어져 있다. 산 위쪽에도 동네가 있는 듯이 제법 큼직한 길인데, 경사가 너무 심해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곳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산자락 위에 자리하여 이름도 예쁜 '산정마을'이란다.
우측으로 시골스런 콘크리트 길을 따라 오르면, 어디서 내려오는지 맑은 도랑물이 졸졸졸 옹알거리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따사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 우측으로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데, 울타리가 없이 작은 나무들이 여기가 울타리임을 알려만 주고 있다.
아름다운 동네, 전하울에 자리 잡은 지 올해가 서너 해가 되었다. 작은 마당에 푸르른 잔디를 심어 놓고, 남들이 언제나 묻곤 하는 밭이라고는 대여섯 평이될까 말까 하는 넓이를 가꾸고 있다. 어려서 시골생활을 했어도 농사와는 상관없는 객지 생활을 했기에 농사짓는 일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농사라는 것이, 할 일 없으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능히 알기에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두 평, 두 평, 세평... 어쩌면 그리 될 밭을 가꾸며 나머지는 잔디를 가꾸고 있는 중인데, 잔디라는 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어쩔까를 고민 중일 정도이다.
하지만, 농사는 할 일 없으면 하는 일이 아니고, 더구나 엄청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농부의 길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돌아가신 선친의 모습에서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황량한 밭뙈기를 골을 부리는 소를 몰아 아름다운 밭고랑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아침이면 밭에서 쉼 없이 노니는 듯하시더니 어느새 밭이랑엔 푸름으로 점을 그려 놓았다. 아침, 저녁으로 이슬을 먹고 자란 배추는 밭이랑을 넘어 밭고랑을 능히 덮을 정도로 잎을 불렸고, 어느새 뙈기밭은 대단한 예술가의 손을 거쳐 검푸른 색으로 변신하였다.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에 순응하는 농부는 진정한 예술가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감히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무례함을 무릅쓰고 예의 없이 달려든 대여섯 평의 거대한(?) 밭에는 풍성한 푸름이 자리하고 있다. 농부라는 명칭에 누가 되지 않을까를 의심하며 아침, 저녁으로 돌보는 밭에는 섣부른 초보 농사꾼의 어리석음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어 죄스럽기도 하다.
산 밑에 자리한 두 평정도 밭에는 스물한 포기의 고추가 껑충하게 키를 불렸다. 초봄, 모종 상회에서 열 포기의 청양고추와 열 포기의 아삭이 고추모를 달랬더니 한 포기를 덤으로 주어 스물 한 포기가 되었다. 푸름이 가득한 5월에 싱싱한 고추를 먹겠다고 심어놓은 고추는 제법 키를 키웠다. 하얀 꽃이 생글거리기도 하고, 이미 달린 고추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어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니 조금은 부끄러워한다. 뒤쪽으로는 이웃에서 얻은 옥수수를 먹어보겠다고 심었지만 그늘이 되어서인지 키만 삐쭉하게 불렸고, 남은 구석에 심은 부추는 싱싱한 모습으로 나풀거리며 위세가 대단하다.
집 쪽으로 붙어 있는 두 평 반 정도 거대한(?) 밭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있다. 일찌감치 아기모를 심었던 대파는 어른 손가락 굵기까지 자라나 이웃을 놀라게 했으며, 뜬금없이 파밭에 자리한 한 포기의 호박은 싱싱한 대파들에게 눈치 거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널따란 잎을 키워 위세가 대단하니 그냥 볼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옆에 심어 놓은 열 포기의 토마토는 푸름으로 가득하다. 다섯 포기의 방울토마토와 일반 토마토 다섯 포기로 총 열 포기인데, 제법 키를 키우고 토마토를 매달고 있어 보기가 좋다. 다섯 포기의 가지도 이제는 살 길을 찾은 모양새이다. 처음 모종을 심었을 때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잎을 괴롭힌 까닭에 크지 못했지만 어느새 가지는 세를 불리고 튼튼한 몸으로 되살아나 꽃을 피우고 자그마한 보랏빛 가지를 달고 있다.
도랑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네에는 농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찾아와 훈수를 주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전수해 주기도 한다. 어느 날 강낭콩을 심어보지 않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얼마간의 강낭콩 씨앗을 건네주었다. 아내와 함께 토마토 옆에 심었지만 싹이 나오지 않아 궁금했다. 하지만 햇살이 풍성해지고 빗방울을 먹고 난 후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낭콩을 심은 땅이 서서히 갈라지고 드디어 작은 콩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신기하여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다독이자, 강낭콩을 푸름을 가득이고 보랏빛 꽃을 피우더니 가느다란 콩꼬투리를 매달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작은 꼬투리는 굵어지고 여기저기에 콩꼬투리가 태어나 제법 그럴듯한 콩밭이 토마토를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시골집에 몇 평의 밭을 일구어 채소와 동무를 하며 살아감이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