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이 주는 즐거움)
가끔은 철없는 고라니가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 바라보면 새끼 고라니가 풀숲에서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골짜기의 이층 서재에서 바라보는 앞산 풍경이다. 자잘한 풀들이 자리해 있고, 곳곳엔 다양한 야생화가 꽃을 피웠다.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벌거벗겨진 민둥산이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푸름을 길러냈다. 집 앞에 펼쳐지는 야트막한 비탈산에 초록의 정원이 자리 잡은 것이다.
야트막한 앞산은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사시사철 수없이 많은 산식구들을 묵묵히 길러냈다. 옅은 초록으로 봄을 알려주고, 기어이 초록은 짙게 물들어 갔다. 연초록 홑잎이 저물어 가면 고사리와 고비 등 갖가지 나물을 길러냈고, 밤나무와 아카시가 꽃을 피워 계절을 노래했다. 산새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길렀으며, 고라니가 찾아오고 산까치가 하늘을 수놓았다. 푸름으로 온 산을 메우며 무더운 여름을 불러 내면, 여름 한 나절엔 매미들의 천국이었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목청을 돋웠다.
여름이 짙어지면 연초록은 어느새 검푸름으로 변했고, 여기에 여름 장마를 거뜬히 견뎌낸 앞산이었다. 고개를 축 늘어트린 가지마다 빗방울을 안고 기어이 거센 장마를 이겨냈다. 더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햇살을 끌어안으며 시원함을 내려주고, 따가운 햇살은 가을을 재촉했다. 여름이 지칠 무렵 시원한 바람을 안고 나뭇잎이 일렁이면 여름이 물러간다는 소식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풍요의 계절이 왔다.
가을이 성숙해지면서 갖가지 열매를 선사했으니 붉음이 가득한 알밤이 있고, 추억의 으름과 다래가 익어갔다. 하늘 꼭대기 잣을 따라 청설모가 날아다녔고, 여기에 다람쥐도 뒤를 따랐다. 잘 익은 밤이 그예 떨어지고, 옹골차게 여문 잣이 툭 떨어지면 어느 틈에 다람쥐가 나타났다. 한적한 그늘에 앉아 잣을 까먹는 다람쥐는 여기가 천국임을 알려줬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 선물을 주던 앞산에 겨울이 찾아왔다.
하얀 눈으로 갈아입은 앞산은 겨울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추위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고랭지 채소가 되는 곳임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해발 300 정도이니 근처의 온도보다도 3~4도가 낮아 그야말로 엄동설한(嚴冬雪寒)이었다. 처절한 추위를 이겨내면 얼음장밑 작은 도랑이 알려주었다. 봄이 조금 남았다는 것을. 서서히 봄이 찾아오는 날, 소곤거리던 도랑물이 촐랑대면 연한 초록이 찾아오던 앞산이다. 기어코 인간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으려는 것이다.
정든 나무가 베어짐에 목이 메었지만, 묵은 나무 베어내고 새나무를 심어야 한단다. 묵묵히 바라보는 앞산은 서서히 꺼풀이 벗겨지고 민둥산이 되었다. 헐떡거리며 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이 얄미웠지만 서서히 산은 제 몫을 해나가고 있었다. 찬 겨울을 이겨내고 새봄이 찾아왔다. 신기한 자연의 힘은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이 초록을 대지 위로 밀어냈다. 민둥산 아래부터 차근차근 초록을 피어냈고, 산말랭이로 기어오르는 초록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자연의 신비함은 눈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나무를 베어내고 수종갱신을 했다. 거만하지만 품위가 있는 거만한 나무, 하양으로 무장할 자작나무였다. 수없이 심어 놓은 자작나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6월 초록이 산비탈을 덮고 말았다. 자잘한 풀이 컸고, 베어낸 나무등걸에서 푸른 싹이 돋아났다. 덩달아 몸집을 불린 자낙나무와 자연이 길러낸 푸르름은 어느새 한데 어울려 정원을 만들어 준 것이다. 여기데 자잘한 풀들이 꽃을 피웠고, 이웃이 만든 비탈밭에는 밝은 호박꽃이 피어올랐다. 아름다운 비탈 정원이 이층 서재 앞에 펼쳐진 것이다. 7월 장마철이 돌아왔다.
아래로는 자잘한 풀들이 자리했고, 수많은 야생화와 어느 틈에 자리 잡은 금계국이 꽃을 피웠다. 어떻게 산비탈에 자리를 잡았을까? 금계국이 피어났고 가끔은 빨강 코스모스가 섞여 있다. 거기에 드문드문 나리가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젠 개꼬리가 나온 이웃집 옥수수도 한몫을 하고 있다. 하양의 개망초는 누가 '개'자를 붙였던가? 비탈밭 한 구석을 은은하게 비추는 하양꽃으로 무장했다. 서재 앞에 펼쳐지는 넓은 정원에는 수많은 산새들이 날아오른다. 산까치가 호령하고, 참새들이 수다를 떤다. 여름뻐꾸기 뜬금없이 울어주고, 뿌연 물안개가 정원을 덮어주는 여름이다. 가끔 고라니 서툰 걸음이 어울리는 나의 정원은 긴 장마철을 이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