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신비, 아이슬란드의 아침)
하지 감자, 봄이 찾아 올 즈음 심어 하지경에 캐는 감자를 말한다. 어렵던 시절,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겨주던 우리의 값진 먹거리였다. 중소를 막 넘긴 소가 어려운 걸음으로 논을 갈아 나간다. 논에는 장마철에 들어설 무렵 못 미쳐에 간간이 내린 비로 늦은 모를 심기 위한 논갈이를 하는 중이다. 벌써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하여 모를 심었어야 하지만, 자그마한 자갈논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먹거리를 얻고자 감자를 캐고, 이모작을 위해 모를 심기 위함이다.
어설픈 중소가 논을 갈아 나가면, 어린아이는 작은 바가지를 들고 그 뒤를 따라서 갔다. 논을 갈아 나가면 땅속에 숨었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감자를 줍기 위함이다. 귀하게 눈에 띄는 감자는 흰 감자도 있고, 자주 빛 감자도 있다. 하지가 다가오자 실하게 영근 감자를 알뜰히 캤지만, 땅 속에 남아 있던 감자가 논을 갈면서 알몸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감자, 듣기만 해도 오래 전의 긴 이야깃거리가 감자 덩굴에서 감자가 매달려 나오듯 하는 그런 '감자'이다.
초봄에 심었던 감자는 모를 심기 전에 캐내고, 그 논에 다시 늦모를 빨리 심어야 벼를 수확할 수 있다. 만약에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른논을 호미로 파고 모를 심는 소위, '호미 모'라도 심어야 귀한 벼를 수확할 수 있다. 만약 벼를 심는 시기가 늦어지면, 벼에 쭉정이가 많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감자는 참으로 요긴하고도 귀중한 먹거리였다.
거무스름한 대소쿠리에 가마솥에서 삶은 감자를 꺼내 놓는다. 미처 식지 않은 감자에서 하얀 열기를 쏟아내는 모습은 보릿고개를 헐떡거리며 넘기는 서민들의 가뿐 숨소리 같았다. 감자가 서서히 식으면, 알차게 영근 감자는 껍질이 군데군데 균열이 가면서 벌어져 있고, 벌어진 껍질에는 하얀 분가루가 송송 솟아나 있다.
분가루가 송송 묻어있는 먹음직한 감자는 껍질을 벗겨 호호 불며 먹는 맛이 일품이지만, 그것을 그렇게 주전부리만으로 먹기에는 너무 힘든 세월이었다.
어머니는 쌀 바가지 밑바닥에 깔리듯이 쌀을 씻어 솥에 넣는다. 그리고 시렁 위에 미리 삶아 삼베로 덮어 놓았던 보리쌀을 듬뿍 넣고, 껍질을 벗긴 감자를 그 위에 더 많이 놓아야 했다. 십 여 마지기 자갈논에서 얻어지는 쌀로 일 년을 버티기에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니, 간간히 보리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보리쌀의 도움만으로도 힘겨웠고, 거기에는 간간히 감자가 톡톡히 역할을 해 내었다.
가마솥에 약간의 쌀과 보리를 섞고, 그 위에 하얗게 껍질을 벗긴 감자를 얹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장마철에 눅눅해진 보리를 턴 보리단은 그예 연기를 아궁이로 토해 내고 만다. 매운 눈을 비비며 끌어 넣은 보리단에 어렵게 불을 붙며 가마솥을 달구었다. 자시 후, 솥뚜껑은 깊은 한 숨을 토해내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린다. 이때쯤 센 불을 조절하여 밥이 타지 않도록 뜸을 들여야 맛있는 밥이 되면서 밥을 태우지 않을 수 있다.
긴 여정을 돌아 커다란 솥뚜껑을 열면, 하얀 김이 한꺼번에 올라오면서 서서히 식구들의 밥이 모습을 보여준다. 제일 위에 눈에 띄는 감자는 하얗게 익어 김이 서려있고, 그 아래로 하야 쌀은 흔적이 희미하지만, 거므스레한 보리쌀은 검은 눈이 뚜렷해 전부가 보리쌀로 보인다.
쌀과 보리를 적당히 섞어 아버지의 밥을 뜬 후, 모두는 골고루 섞어 커다란 사기그릇에 가득히 밥을 푼다. 그러고 남은 감자는 골고루 분배되는데, 모두의 밥그릇의 위에 두서너 개가 놓인다. 그것은 싫다 좋다의 말이 필요 없는 무언의 약속이었고, 먹어야만 하는 여름날의 처절한 양식이었다.
지난해 먹고 남은 몇 개의 감자가 군데군데 하얀 싹을 밀어내고 말았다. 싹이 난 감자는 감자 싹에 '솔라닌'이라는 독성이 있어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 아내의 설명이다. 감자 싹을 도려내고 먹기도 불편했지만 농부의 땀으로 만들어진 감자를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끝에, 오래전 어머니의 감자 농사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감자 싹이 다치지 않게 감자 싹이 난 부분을 오려 땅에 묻고, 비닐로 두둑을 덮어 놓았다. 날씨가 썰렁해서 그런지 감자 싹은 보이지 않고 풀만 무성하더니, 날씨가 따스해지자 감자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자 감자 잎이 무성하게 자랐고, 어느덧 감자 꽃이 피었다. 기쁜 마음에 열심히 돌보면서 풀을 뽑아 주었더니 감자는 무성하게 잎을 키웠다.
얼마 전에 손녀가 찾아왔기에 손녀와 함께 감자를 캐 보기로 했다. 줄기를 제치고 땅을 파는 순간, 손녀와 함께 깜짝 놀라고 말았다. 땅을 파자 감자가 주렁주렁 달린 것이 아닌가! 감자를 더 캐보자는 손녀를 만류하고 감자가 더 영글도록 흙으로 묻어 놓기로 했다. 감자 싹이 무성해 더 두어도 좋다는 생각에 하지가 지나도록 감자를 그대로 두고 영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주는 뒤 밭의 감자는, 감자 싹이 시들해지면 손녀를 초청해 감자를 캐볼 작정이다.
오래전 밥그릇 위에 놓인 서너 개의 하얀 감자, 언제나 여름 밥상에서 만나야 하는 거룩한 밥상이었다. 몇 그루의 감자를 심어 자연의 오묘함에 머리 숙이고, 오래전 감자의 맛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여름이 행복하기만 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소중한 삶을 이어주었던 귀한 하지 감자는, 오늘도 오래 전의 추억을 알려주려는 듯이 무럭무럭 영글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