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동부를 아십니까?

(동부의 아름다운 기억, 미얀마 인레 호수)

by 바람마냥

혹시, 콩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동부를 아십니까? 가을이면 익어가는 꼬투리 모양이 콩팥처럼 생겼다고 해서 신곡(腎穀)이라고도 한다. 초봄이 오면 두 배미의 논을 냇가의 물로부터 보호하고자 길게 쌓아 놓은 둑엔 푸르른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풀이 무성한 둑을 그대로 놀려 둘 수가 없었기에 언제나 중간중간에 구덩이를 파고 호박을 심으시기도 하고, 가을이면 길게 늘어진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동부 꼬투리를 얻기 위해 동부를 심기도 하셨다.


호박 구덩이 옆, 군데군데 호미로 일구어 동부 몇 알을 놓아 흙으로 묻고 질끈 눌러 놓는다. 봄비가 내리고 따스함이 찾아오면 동부 알은 어느새 불쑥 대지를 이고 일어서 있다. 노란 동부 알이 내민 초봄의 아름다움은 어느새 분홍 꽃으로 변하더니 익어가는 여름을 따라 기다란 줄기가 뻗어 나간다.


둑에 무성한 잡초가 있음에도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간 동부 줄기는 중간중간에 매듭을 맺어 넓적한 잎을 키웠고, 잎사귀 앞이 미끈한 반면에 뒤면은 까끌까끌한 솜털이 솟아나 있다. 이렇게 자라난 동부 줄기는 어느새 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꼬투리가 자리하게 된다.


이때쯤 되면, 어머니는 동부 줄기마다 싱그럽게 자란 동부 잎을 속아가면서 따시는데, 동부 잎의 용도는 밥을 싸 먹는 쌈의 용도였다. 동부 잎을 밥솥에 넣어 살짝 쪄내면 파란 잎이 조금은 검푸른 색이 되면서 숨이 죽게 되는데, 동부 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밥을 얹은 다음에 양념장을 놓아먹으면 한여름의 입맛을 돋우는 멋진 찬이 되었다. 양념장에는 가느다란 파나 달래를 자잘하게 썰어 넣고, 약간은 매운 듯한 고추를 다져 고소한 참깨와 함께 넣으면 멋진 양념장이 되었다. 이렇게 동부 잎을 따서 여름을 지내다 보면 동부 줄기는 길게 키를 키웠고, 구부러진 동부 꼬투리는 검푸른 색으로 채색되었다.


여름이 점점 깊어지면 동부 줄기는 굵직하게 몸집을 불렸고, 동부 꼬투리는 동부가 실해짐에 따라 불룩불룩하게 알통을 키웠다. 긴 여름을 즐기듯이 시냇물은 넉넉히 흐르고 덩달아 매미는 긴긴 여름날을 구슬프게 울어댄다. 논배미 위 밭에는 여름내 자란 고추가 초록을 빨강으로 물들이느라 매운 냄새를 냇가에 가득 채우고, 고추 가지는 어느새 밭고랑은 잎으로 가득 메웠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중간중간엔 메뚜기가 동부 잎을 마당 삼아 뛰어다니고, 이웃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이 한결 반갑다. 바람이 썰렁썰렁 불어 가을이 깊어지면 볏논은 벌써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고, 붉은 고추가 가지를 느려 뜨려 밭고랑은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어머니는 고추밭을 오가며 쉴 날이 없는 반면 아버지는 못 본체 하시면서 논 일에만 몰두하신다.


고추가 익어가고 벼가 익어가면서 풍성해진 가을이 넉넉해질 무렵, 동부는 어느새 무럭무럭 익어 누런빛을 발하게 된다. 동부 잎을 마당 삼아 놀던 메뚜기도 어느덧 살이 찌고,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도 울다 지쳤는지 쉰 목소리로 힘에 겹다. 누런 벼를 따라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벼에 남은 초록마저 가을빛으로 물들이면 하늘엔 빨간 고추잠자리가 가득히 춤을 춘다. 가끔 찾아오는 참새가 입맛을 다시면 우뚝 선 허수아비 눈을 흘기고, 도랑의 송사리 떼 덩달아 헤엄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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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는 농사일 틈에 어머니는 점심을 챙겨야 했으니 먼 집을 오가는 발걸음은 쉴 날이 없다. 시원한 바람을 이웃 삼아 냇가가 있는 둑에 앉아 먹는 가족 점심은 더없는 풍성한 밥상이었다. 비록 볼 것 없는 점심 밥상이지만 웃밭에 고추가 가득이고, 논에는 햅쌀이 누렇게 익었으니 가슴 설레는 점심상이었다. 가끔 튀어 오르는 메뚜기도 정스럽고, 울다 지친 여름 매미도 이웃이 되어 익어가는 가을 들녘은 평화로움으로 가득하다.


어느새 더운 바람이 찬바람으로 바뀌면 논에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일 무렵, 고추밭은 어느새 붉은빛 감추고 어설픈 초록빛만 남아있다. 하늘가 고추잠자리 신나게 맴을 돌 때, 기다란 동부는 익을 대로 익어 작은 바람에도 툭 터지며 알을 토해낸다.


어머닌 해가 넘어가기 전, 누렇게 익어가는 동부 꼬투리를 하나둘씩 소쿠리에 담아 소쿠리는 묵직하게 가득해진다. 마당가 멍석에 고추를 말리고, 작은 맷방석에 펼쳐진 동부는 내리쬐는 햇살에 따라 누런 껍질이 뒤틀리며 알을 쏟아낸다. 붉은빛을 내는 동부 알은 팥과 같이 밥에 얹어 먹을 수 있지만, 약간의 달큼함을 주는 콩과는 다르고 푹신한 맛을 주는 팥과는 또 다른 맛을 전해준다.


햇살에 터진 동부를 덜어내고, 덜 까진 동부는 가느다란 부주깽이로 두드리면 여지없이 알을 토해내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동부의 가을걷이가 끝나게 된다. 고추나 벼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골의 주된 양식이었지만, 고추밭이 있고 볏논이 있는 둑에 슬금슬금 심어놓았던 동부는 덤으로 얻는 양식이었다. 푸르른 잎을 반찬으로 삼고, 기다란 꼬투리에 담겨 가을을 먹고 익은 동부 알은 콩, 팥과는 다른 맛을 주는 어머니의 전공 작목이었다.


일 년의 농사로 얻어진 동부는 추석에 만드는 송편 속으로는 안성맞춤이고, 더러는 밥에 넣어 먹으면 부드러우면서도 달큼한 맛을 준다. 동부 농사는 어머니만이 챙기는 알뜰한 일 년 농사로, 어머니의 주작물 동부는 오래전 당신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논둑 가의 아름다운 추억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