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이 피었습니다.

(호박 농사가 주는 기억, 쿠바의 코히마루해변, 헤밍웨이의 놀이터)

by 바람마냥

병꽃나무 울타리에 힘겹게 오른 호박넝쿨에서 노란 호박꽃이 피었다. 발그레한 병꽃과 어우러진 노란 호박꽃은 하늘로 입을 벌리고 여름 한나절을 즐기고 있다. 가끔 찾아오는 벌이 주위를 돌며 병꽃으로 왔다 호박꽃으로 오기도 하면서 동무가 되는데, 호박꽃에 머무는 때가 더 많아 발그레한 병꽃은 수줍은 듯 낯을 붉힌다. 덩달아 날아온 잠자리는 병꽃나무에 앉아 호박꽃 속으로 드나드는 벌을 바라보며 찾아온 바람에 날개를 바르르 떤다.


울타리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호박씨가 자리 잡은 것은 초봄이었다. 삽으로 두어 삽 정도의 구덩이를 넓게 판 후, 지난해 모아 놓았던 두엄이 놓아지고 그 위에 고운 흙이 올려졌다. 고운 흙과 거름이 섞여 며칠이 지나고 거름이 고운 흙에 기운을 줄 때쯤, 어머니는 몇 알의 호박 씨앗을 호미의 힘을 빌려 그곳에 묻어 놓았다. 대지와의 인연이 닿아지자 위대한 대지는 습기를 밀어 올렸고, 가끔 내린 빗물과 호흡을 하며 씨앗은 위대한 생명의 출연을 예고했다.


고운 흙을 가만히 밀어 올려 대지에 균열을 주더니 거름의 힘에 못 이기듯이 고운 싹이 노란 모양으로 쏙 얼굴을 내밀었다. 한 잎이 나오더니 그 옆에 덩달아 이웃이 얼굴을 내밀었고, 외로움 달래듯 또 한 잎이 이웃되었다. 아침으로 내리는 이슬을 먹고 어느새 줄기는 실하게 살을 찌웠고, 마주 보고 나왔던 두 잎은 제법 검푸름에 하얀 실 무늬를 실었다. 내리쬐는 봄볕 따라 검푸른 호박잎은 넓어지면서 가느다란 줄기는 제법 몸집을 불렸다.


제법 굵직한 줄기는 병꽃나무에 기대어 키를 늘리더니 작은 솜털 가시가 돋아나면서 제법 호박 줄기로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호박잎은 널따란 모양으로 자라나며 까끌까끌한 잎으로 변신하였다. 자라난 호박 줄기는 덩굴손이 병꽃나무를 감으며 잡아줌으로 나무 위로 오르면서 자라고 있다. 호박이 달리면 힘껏 줄기를 지탱해 주기 위해 여러 개의 덩굴손이 나무를 감으며 잡아 언제나 든든해진다.


호박꽃은 암수의 꽃이 같이 피어나는데 수꽃은 중앙에 하나의 꽃술을 내밀고, 암꽃은 왕관 모양으로 여러 개의 꽃술이 달려있다.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어나는 호박꽃은 종 모양의 황색 꽃이 잎겨드랑이에 하나씩 피어난다. 수꽃을 찾았던 꿀벌이 꺼칠꺼칠한 다리에 수꽃 꽃가루를 암꽃 수술에 묻혀 줌으로써 수정이 되고, 암꽃은 호박으로 변신하게 된다. 자그마한 호박을 뒤에 달고 난 암꽃은 시들어 떨어지고 호박은 무럭무럭 자라나게 된다. 자연의 섭리를 처절하게 따르면서 태어난 호박은 영양 조건에 따라 커다랗게 자라기도 하고, 중간에 떨어지는 비운을 맞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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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자란 자그마한 호박은 거룩한 반찬거리로 거듭나게 된다. 조막만 하게 자란 호박은 둥글게 재단이 되어 맛있는 호박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적당하게 자란 호박은 뜨끈한 국수에 얹혀 국수의 맛을 한층 돋워주는 조미료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호박 줄기가 병꽃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면서 잎이 무성해지면 호박잎은 또 한 번 멋지게 변신한다. 적당히 연한 호박잎을 살짝 데쳐서 양념장에 찍어 먹는 맛은 대단한 한 여름의 반찬이다. 조금 큰 호박잎은 억세어져서 먹기가 곤란한데, 연한 잎을 드문드문 속아 내어 밥을 할 때 넣고 살짝 찌면, 쌈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 주어 맛이 좋다. 진하지 않은 간장에 가느다란 파를 잘게 썰어 넣고, 살짝 매운 고추를 다져 넣은 후 고소한 참깨로 마무리를 하면 더없는 멋진 소스가 된다. 연한 호박잎을 이 멋진 간장 소스에 찍은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쌀밥에 얹어 먹는 맛은 여름 반찬 중 단연 으뜸이다.


여름이 익어가면서 호박이 풍성하게 열리면 언제 달렸는지 알 수 없는 호박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병꽃나무 꼭대기에서 날름거리며 달린 호박은 어느새 깊이 영글어 여름 반찬거리론 지나버려 호박고지를 만들기 안성맞춤이다. 호박을 반으로 갈라 안쪽에 자리한 호박씨를 발라내고 호박을 켜켜이 자른다. 켜켜이 자른 호박을 햇살 좋은 양지쪽에 자리를 펴고 말리면, 겨울을 지나고 새봄이 오도록 멋진 반찬거리가 된다. 햇살에 마른 호박고지는 꼬들꼬들하면서도 맛깔나고, 어느새 스민 달큼한 호박 향이 입맛을 북돋워 준다. 호박고지에 간을 하고 초봄에 대지의 힘을 받고 태어난 달래를 잘게 썰어 무치면 고소하고도 식감이 좋은 호박 나물이 되기도 한다.


병꽃나무에 오르지 않고 수풀로 스며든 호박 줄기에는 어느새 붉게 익어버린 호박을 서너 개 매달고 누워있으니, 이것 또한 겨울의 신나는 먹거리이다. 둥글게 생긴 누런 호박은 골골이 주름이 갈라지면서 세월의 나이를 새긴 듯하고, 둥글게 똬리를 틀며 불린 몸집이 탐스럽기도 하다. 수풀을 헤집으며 찾아낸 붉은 호박은 노력 없이 얻어낸 거져 얻은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여름의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었고, 아침저녁으로 이슬이 찾아왔으며 더구나 벌들의 노력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가을날의 선물이다.


누렇게 익은 호박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해야 썩지 않으며, 추운 곳에 두면 썩어버리기에 일 년의 자연과 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만다. 적당한 온기가 있는 곳에 보관하여 적당히 숙성된 붉은 호박은 여러 가지로 우리와 가까운 음식이다. 특히 부기를 내려주는 음식이라고 하여 산모에게는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고, 늙은 호박의 당이 위점막을 보호해 주고 소화를 돕기에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에게도 좋은 음식이다.


늙은 호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호박죽인데, 늙은 호박을 배를 갈라 당차게 영근 씨앗은 내년 씨받이로 하기 위해 발라 놓는다. 숟가락을 덕덕 긁어 씨를 발라 햇볕 좋은 곳에서 습기를 말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해 놓아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


씨를 발라 내고 남은 누렇게 익은 호박 껍질을 벗겨내고 적당히 잘라 삶은 후, 삶은 호박을 잘게 갈아야 한다. 잘게 갈아낸 호박에 설탕이나 소금을 적당히 넣어 끓이면 되는데, 여기에 잘게 썬 고구마를 넣으면 식감이 뛰어나게 된다. 호박죽에 대추나 잦을 넣어 주면 또 다른 맛을 주는 호박죽이 된다. 따스하게 끓인 호박죽에 적당히 익은 겨울 김치를 곁들이면 더 없는 겨울의 멋진 먹거리가 된다. 자연과 합작으로 만들어낸 호박 줄기가 병꽃나무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일 년 내내 만들어진 음식들이 나무랄 수 없는 우리의 음식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수많은 추억이 담긴 호박을 두어 그루 심어 보았다. 어쩐 일인지 줄기가 무럭무럭 자라 근처에 있는 벚나무에 기어올라 탐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호박이 달릴 것인가를 아침마다 올려다봤지만, 기어이 한 개 만을 주고 그만이었다. 정성이 부족하여 그러려니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눈이 무서워서라도 한 두 개 더 달렸으면 했어도 영영 그만이었다.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 호박 줄기는 말라죽고 말아 그동안 바라보고 가꾼 노력에 비해 서운하기도 했다. 올해는 또 한 번 심어보고 싶기도 하고, 또 헛된 꿈으로 오랜 전 어머니가 하시던 노력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한다. 언제나 가까이할 수 있는 멋진 호박이지만 사람의 노력과 자연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호박이다. 그렇게 쉽게만 보였던 어머니의 호박 농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농부의 기술이고 예술이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는 호박꽃을 누가 호박꽃이라고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황금색을 발하는 호박꽃이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까지 우리와 가까이 있음이 너무나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닌가? 호박꽃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호박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는 꽃 중의 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