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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06. 2020

오이가 꼬부라졌네!

(꼬부라진 오이가 주는 추억, 페루의 우루소 섬)

감나무 밑에 자리한 초가집을 중심으로 울타리가 있지만, 말로만 울타리이고 이것이 울타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초가집의 대청에서 방을 지나 뒤 울로 나가면, 자그마한 툇마루가 있어 더운 여름날 낮잠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아이는 이 작은 마루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리나 되는 학교길에 지친 아이는 감나무가 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찬밥을 하얀 사기 사발에 넣고 시원한 물을 부었다. 그 옆에는 그럴듯한 반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종지에 담긴 빨간 고추장 하나, 그리고 방금 울타리를 넘어 따온 구부정한 오이가 몇 개 있다. 찬물을 물에 만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구부정한 오이를 고추장에 쿡 찍어 한 입을 베어 물으면 이것보다 더 좋은 반찬이 없다. 이때 시원한 감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갖 시름을 날려 보내 준다. 


감나무 밑에 있으나마나 한 울타리를 넘어 아래 밭에서 따온 구부정한 오이… 어머니는 초봄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감나무 밑에 있는 아래 밭에 오이씨를 땅을 파고 묻어 놓았다. 이렇게 묻어 놓은 오이 씨앗은 돌 보지 않아도 스스로 싹을 틔우고, 두  잎이 나와 자리하더니 어느새 넝쿨을 만들어 밭고랑을 기어 다니게 된다. 그러면 어머니는 감나무 밑에 널려있는 나무를 찾아, 오이가 올라갈 수 있는 지지대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오이는 스스로 기어 올라간다. 이렇게 오이 덩굴이 나무를 타고 오를 즈음이 되면 오이 덩굴도 실하게 살이 오르고, 어디서 나왔는지 수염인 듯한 파란 가느다란 줄기가 나와 나뭇가지를 돌돌 말아버린다. 아침마다 이슬을 먹고, 가끔 내리는 빗방울이 오이 잎을 적시여 주면, 오이는 노란 꽃을 피우고 손마디만 한 오이를 달게 된다. 


줄기 마디마다 오이가 생기면, 그 끝으로 노란 꽃이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일렁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꽃은 떨어지고, 오이는 서서히 모양을 갖추게 된다. 오이 줄기가 더 자라 지지대 위로 올라 서면 오이는 손가락만큼 커지게 되고, 오이는 드디어 땅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이의 위엄을 갖추게 된다. 


지지대 아래로 늘어진 오이는 수줍은 듯 커다랗게 커진 잎에 숨었다. 비가 자주 오게 되면 오이는 쑥쑥 자라면서 달큼함을 전해주지만,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오이는 어느새 쪼그라들며 쌉쌀한 맛을 머금고 볼품이 없게 된다. 오이가 적당히 익으면 오이에  자그마한 가시가 달리는데, 손으로 비벼주면 적당히 기분이 좋을 정도의 감촉을 주며 떨어진다. 


가끔 오이에 퇴비를 주고 오이보다도 더 잘 자라는 잡초를 뽑아 주면, 오이는 여기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줄기 곳곳에 주렁주렁 오이를 매달아 놓는다. 어머니는 오이를 따서 비스듬히 잘라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놓으신다. 비스듬히 잘라진 오이를 양푼에 넣고, 여기에 파와 마늘과 양파를 적당히 잘라 넣으신 다음, 초고추장을 넣어 버물여 주시면 새콤한 오이무침이 된다. 따스한 밥과 어우러진 새콤한 오이 맛은 신선함을 주지만, 아이는 기다릴 여유를 주지 않고 길고도 구부정한 오이에 고추장을 찍어 맛있는 반찬으로 점심을 먹곤 한다.


오이는 시골의 중요한 반찬거리로 몇 포기를 심어 놓으면 충분히 반찬으로 먹고, 남은 오이는 서서히 세월을 따라 늙어가게 마련이다. 파랗고도 먹음직한 오이를 놔두면 약간의 검푸른 빛을 띠기 시작하고, 이것을 더 놔두면 황색으로 변하면서 오이는 커다란 몸집을 불리게 된다. 세월이 더 흘러 가을이 깊어지면 오이 덩굴은 어느덧 푸름을 서서히 잃어가고 오이는 땅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봄에 싹을 틔워 여름내 맛있는 반찬거리를 준 오이는, 아이가 먹고 남은 오이마저 누렇게 노각으로 변하면서 다시 멋진 반찬이 된다. 노각의 껍질을 벗긴 후, 안쪽의 씨를 발라내고 나면 하얀 속살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잘게 썰어 각종 양념과 고추장이 어우러지면 사각사각하는 시원한 반찬이 된다. 아이에게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입맛이 된 추억의 오이 맛이다. 가끔 어머니가 해주시는 오이 반찬도 맛이 있었지만, 구부정한 오이가 되었든지 아니면 반듯하게 잘 생긴 오이든지 뻘건 고추장에 찍어 먹는 오이는 여름날의 멋진 맛이었다. 


다시금 이 맛을 찾을 요량에 뒤뜰 작은 밭에 오이를 심고, 덩굴이 커지기를 바라며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덩굴은 자라나고, 어설프게 만들어준 지지대 위로 오이 덩굴은 자리를 잡았다. 줄기 곳곳에 꽃이 피고 어느덧 자그마한 오이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이는 오래전에 만났던 오이가 되질 않고, 장마철이 오고 나선 작은 오이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오이 넝쿨을 지지대 위로 올려 끈으로 고정시켜 바람이 통하도록 해 줬다. 그러자 오이가 생기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꼬부랑 오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게 되는 것도 몇 개만이었다. 


오이를 심어 놓고 병충해로부터 자유롭게 소독을 하지 않았기에 자라면서 떨어지고, 남은 오이마저 꼬부랑 오이가 되고 만 것이었다. 할 수없이 오이가 자라는 대로 그냥 두기로 하고 소독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 어머니는 오이를 심어놓고 소독이라는 말은 생각지도 않았을 텐데도 실하게 자랐는데,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정성을 쏟아도 그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꼬부라진 오이 몇 개로 일 년의 오이 농사를 마감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오이는 내 오이와는 다른 무엇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던 오래 전의 어머니의 오이 농사는 대단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오이 농사를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보고 흉내를 낸다는 것이 당초부터 잘 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올해에도 다시 어머니의 오이 농사 흉내를 내면서 한 해를 다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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