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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22. 2020

개꼬리가 나왔습니다.

 (옥수수가 주는 추억, 아이슬란드의 아침)

말린 쑥을 짚단 위에 놓고 불을 지펴 나오는 매콤한 연기엔 사나운 모기도 맥을 못 추고 윙윙거리다 달아난다. 이렇게 모기를  쫓으며 멍석 위에 두런두런 둘러앉아 옥수수를 먹는 여름밤은 식구들의 단란한 휴식이었다. 


제일 잘 익은 옥수수는 아버지께 드리고, 나머지를 두서너 개씩 받아 옥수수를 몇 개씩  뜯어먹기도 하고, 손바닥에 한 움큼 모아 입에 털어 넣기도 한다.  입에서 씹히는 옥수수는 고소한 맛과 함께 왠지 흐뭇한 기분을 주고, 바닥의 껄끌한 멍석은 간질간질한 등짝에 시원함을 안겨주는 여름밤의 행복이었다. 


옥수수 알이 속속들이 들고, 기계로 찍어 낸 듯이 알이 일렬로 열을 맞추어진 것이 아니다. 이가 빠진 듯이 드문드문 알이 박혀있고, 더러는 옥수수수염이 붙어 있는 옥수수지만, 서너 개의 옥수수가 세상의 행복을 모두 안겨준 듯했다. 가끔은 반딧불이가 하늘을 가로질러 헤엄을 치고, 처마 밑에 자리 잡은 제비가 종알 거기는 밤이 마냥 고요하기만 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바라보는 하늘에는 곧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있고, 시원한 바람마저 찾아주면 저절로 잠이 드는 아름다운 저녁 밤이다.

이렇게 우리 곁에 행복으로  다가왔던 옥수수는, 초봄에 어머님의 부지런함으로 고추밭 가에서 싹을 틔웠다. 가끔 찾아오는 봄비에 잎과 뿌리를 적시고, 어머님의 손길이 오가는 중에 어느덧 옥수수 키는 훌쩍 크고 말았다. 가냘프게 자란 옥수수가 여름 비가 몰고 오는 바람에 못 이겨 몸을 뉘면 어머니는 흙을 북돋워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고단한 여름을 나면서 어느덧 입사귀가 풍성해지고 키 빼기가 쑥 자라나 잎사귀가 제법 나풀거린다.


몇 개의 잎이 층층이 자라나고, 옥수수 대가 풍성해지면 어느 날 느닷없이 옥수수 꼭대기에 개꼬리가 나온다. 하얀 열매를 다닥다닥 안은 듯한 옥수수 꽃이 피면 어머니는 개꼬리가 나왔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옥수수의 수꽃인 것이다. 반짝이는 햇살 따라 일렁이는 꽃은 의기양양하게 으스대며 파란 하늘에 손을 흔든다. 이렇게 수꽃이 피고 나면 덩달아 잎사귀 겨드랑에 작은 열매를 맺으며 옥수수가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것이 옥수수수염이라고 하는 암꽃이 나오게 된다. 


옥수수는 비와 바람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어느 날 바람 따라 찾아온 꽃가루가 연초록 암꽃에 자리하면 수염은 부끄러운 듯이 붉게 변하며 열매를 맺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줄기와 잎의 겨드랑이에 자리한 옥수수는 찾아오는 햇살과 바람을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익어간다. 옥수수가 어느 정도 익어가면 수염은 검게 변하는데, 아이는 옥수수가 익었는지가 궁금해 손톱으로 껍질을 헤집어 보기도 한다. 어느덧 햇살이 풍부해지면 옥수수는 통통하게 영글고 수염은 검게 변한다. 

옥수수가 영글면  머리에 흰 수건 질끈 얹은 어머니는 햇살이 눅눅한 저녁나절에 소쿠리를 옆에 끼고 옥수수를 따신다. 잘 익은 옥수수를 골라 옥수수를 잡고 아래쪽으로 젖히면, 옥수수는 옥수숫대를 움켜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친다. 다시 힘을 주어 아래로 재끼면 그때야 포기를 하고 떨어지게 되고, 긴 잎을 벗긴 후 소쿠리에 담는다. 


한참의 힘겨룸으로 얻은 옥수수는,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대문 녘 멍석 위에 놓고 하나씩 껍질을 벗기게 된다.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너무 익은 옥수수는 내년의 씨앗 감으로 보관하기 위에 속껍질을 한두 겹 남긴다. 몇 개의 속 껍질이 남겨진 옥수수는 남겨진 껍질로 아이들 머리 땋듯이 하여 햇살이 잘 드는 처마 밑에 묶어 말린다. 


먹기 좋게 적당히 익은 옥수수는 커다란 가마솥 밑바닥이 깔릴 정도의 물을 넣고, 그 위 소쿠리에 옥수수를 넣어 불을 지피면 김이 올라 옥수수는 먹기 좋게 익게 된다. 한참의 불을 지핀 후 가마솥 뚜껑을 열면 푸짐한 김이 올라오면서 고소한 옥수수 익은 냄새가 부엌문을 뚫고 마당에 가득해진다.


저녁을 챙겨 먹은 긴 여름밤이 되면,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유일한 먹거리였던 옥수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추억이 가득한 옥수수가  여름철이 되면 오가는 길가마다 넘쳐나고, 대량으로 생산된 옥수수를 사시사철 만날 수 있다. 옛날보다 맛도 훨씬 나아졌고, 이런 고단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옥수수가 훨씬 많아졌다. 자루째 구매가 가능하고 그것도 전화 한 통화로 가능해졌으니 편리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몫으로 따끈한 옥수수를 받아, 한 알 한 알 먹으면서 줄어드는 옥수수가 아쉽기도 하고, 옥수수를 먹으면서 다가오는 포만감에 서늘한 여름밤이 마냥 더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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