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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04. 2020

어머님의 기도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부석사  )

오래된 향나무는 가지가 너무 무거웠는지, 한쪽으로 서서히 허리를 숙여 꼭대기 가지가 기어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향나무는 어느 쪽이 뿌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가까이에 와서도 한참을 바라봐야 어느 쪽이 뿌리인지 알 수 있다. 다시 뿌리를 타고 오른 대지의 기운은 향나무의 휘어진 중간에 싹을 틔우고, 그 싹은 빗물과 햇살을 먹이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온 향나무는 중간이 사람 허리 보다도 훨씬 굵어진 모습으로 아래에 유유히 흐르는 샘물을 휘감아 덮고 있다.


향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은 가장자리 쪽으로 돌을 총총히 쌓아 올려놓았고, 위 쪽으로는 잔디로 마감을 해 놓아 잘 못하면 잔디 잎이나 흙이 샘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샘물은 뒤 산을 뚫고 나오는 맑은 물이었기에 여름에는 손을 오래 담그지도 못할 정도로 차가웠고, 얼마간의 더럽힘은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듯하다.


겨울이 오면 김이 모락모락 나올 정도로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는 묘한 샘물이기도 했다. 샘물 앞쪽으로는 작은 도랑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놓아 항상 물이 졸졸 흐르는 광경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냉장고와는 먼 시골에서, 여름이면 김치를 담가 놓는 기막힌 냉장고였고, 여름에 텃밭에서 수확한 참외나 수박을 담가놓으면 며칠을 견딜 수 있는 냉동고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하였다. 여름 한나절 뙤약볕에서 땀에 전 등을 내놓고 등목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고, 둥그런 향나무 덕에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좋은 원두막이기도 하였다.


유용하게 쓰이는 우물에 흙이 흘러들고, 낙엽이 떨어지면 샘물을 모두 퍼내고 바닥을 닦아내어 성스러운 샘물을 보존하곤 했다. 청소를 하는 날이면 어른들이 힘을 모아 물어 퍼내고 바닥을 닦아 내는데, 아래쪽에는 가재가 어슬렁거리며 깨끗한 물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시 샘에 물이 차고 도랑을 따라 흘러내려면 깨끗한 물줄기 따라 가재가 서성이고, 도랑 아래쪽엔 고마니 풀이 앙증스러운 꽃을 피우면서 샘가를 치장해 준다. 가끔은 도랑가에 풀을 베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어야 하지만, 푸르른 물가에  검푸름을 더해 주니 더없는 정겨움을 준다.

성스러운 우물에, 위쪽으로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위대한 향나무가 있으니 어머니는 이 우물을 엄청 위하시면서 살아오셨다. 성스러운 샘물과 위대한 향나무가 어우러진 우물가는 어머니에겐 성스러운 성지였고,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구역이었다.


어머니는 신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정월 대보름과 풍년농사에 감사하는 가을에는 푸짐하게 시루떡을 하셨는데, 제일 먼저  정성스레 접시에 떡을 담아 우물가에 놓으시고 무언가를 열심히 기도하셨다. 아이는 어머니가 무엇을 기도하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 정성스러워 멀리서 숨죽이며 바라볼 뿐이었다. 소리 없이 커가는 자식들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오늘도 끊임없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으리라.


제사나 차례상에 필요했던 만수향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이 이 향나무의 중간을 예리한 칼을 사용해 조각으로 떼어 만수향 대용으로 사용하여 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향나무 중간 부분에 상처가 나 보기 흉해지자,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향나무에 손을 대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 후로는 누구도 우물가 향나무에 감히 손을 대는 일이 금지되었고, 향나무는 오래 전의 제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물 뒤쪽으로는 푸른 산이 있고, 그 아래에 아름드리 향나무가 활 모양으로 휘어져 성스러운 우물을 보호하고 있으며, 아래쪽으로 흐르는 향긋한 우물은 있는 그대로가 엄청난 그림이었다. 그중에 산이 없어지든가 아니면 향나무가 없어져도 아니 되고, 우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모두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성스러운 우물을 수북이 덮으며 샘을 지키던 향나무에 어느덧 사람들이 시선이 모아지기 시작하고 말았다. 상당한 금액의 금전을 제시하며 향나무를 흥정하길 원했으나, 어머니가 끔쩍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항상 그 자리를 버티던 향나무는 얼마간을 버티며 아름다운 우물가를 장식하고 있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정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상관도 없는 이웃이 허락도 없이 향나무를 팔려다 무산되기도 하였고, 그 후로도 많은 장사꾼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근근이 자리를 지키던 우물가는 사람의 인적이 뜸해지자 세차던 물줄기는 힘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덩달아 향나무도 세월의 위용을 잃어갔다.


돌보는 이가 없는 우물은 더럽혀지고, 푸르던 향나무의 거만함이 없어지자 이 틈을 노린 장사꾼이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놔두는 것보다는 파는 것이 좋다는 등의 감언이설에 향나무의 물림 주인은 넘어가고 말았으니, 어머니의 성스러운 성지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거대한 향나무와 시원한 물을 담고 있던 우물은 흔적 없이 없어졌고, 그곳엔 뻘건 황토가 덮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를 하셨던 샘은 황톳빛 흙으로 덮이고 위용스러운 향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스러운 우물가엔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기도만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이전 14화 어머니, 오늘이 처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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