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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Sep 27. 2024

추석즈음의 계절, 갈 곳이 없어졌다.

(추석을 보낸 세월의 생각)

어린 시절, 무엇인가 신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 먹을 것이 풍성한 추석즈음의 계절이었다. 앞 뜰엔 누런 벼가 아버지를 즐겁게 해 주고, 뒷산에 실한 도토리가 어머니를 설레게 했다. 툭하고 떨어지는 알밤이 주머니에 가득이었고,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열려 바람그네를 탔다. 바로 추석 즈음의 시골 풍경이다. 지난 추석 5일 장에서 어머니한테 얻어 입은 옷, 허옇게 해졌지만 주머니가 많아 좋았다. 밤과 도토리를 주워 가득 넣을 수 있어서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도토리를 한 주머니 주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아이였다. 엄하신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려 소풀을 한 짐 베어왔다. 아버지를 웃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음이 서럽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추석 무렵, 추석즈음이 되면 동네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오순도순 살아가는 초가집이지만 늘 행복했다. 외지로 돈 벌러 나간 이웃들이 찾아오고, 지나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주막거리에 쏟아 놓은 한 무리의 사람들, 손에는 바리바리 선물이 들려있다. 떠들썩한 동네길이 언제나 풍성했다. 


오늘도 어머니는 울타리 너머에 눈이 가 있다. 떠들썩하게 올라오는 무리 속에 혹시 큰 아들이 있나 해서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던 큰 아들, 타지에 나가있던 장손은 늘 소식이 없었다. 일 때문에 그리고 볼일 때문에, 늘 명절엔 없는 장손이었다. 부모님은 무덤덤했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 우선은 큰 아들이었다. 모든 것은 장손이 우선이었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도 그러했다. 


부모님의 처분만 바라던 차남, 한마디의 의견도 내지 못하고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과 가족의 화목을 위한 무언의 수긍이었다. 부모님은 왜 그렇게도 장남을 챙기셨을까? 어림할 수도 없었던 철부지는 궁금했지만 그럴려니 세월은 흘렀다. 부모님의 마음속엔 당신들을 비롯해 조상을 모시는 것에 대한 숙제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장손에게 이 어려운 일을 부탁할 수 있을까? 피와 땀이 서린 작은 재산이라도 장손에게 우선권을 준 이유였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형님마저 돌아가시며 다시 그 장손이 맡아야 했다.


동생들의 의사와 관계없는 재산 분할이었고 그 장손은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단지 살만하다는 생각과 가족의 안녕을 위한 무언의 승낙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세월은 흘러갔고 형님이 돌아가시면서 모든 일은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세월 동안 장손의 장손 역할을 충실히 하는 듯했으나 세월은 그냥 두질 않았다. 모든 재산 상속은 완료되었고 상황은 종료되었으니 의무사항은 어려운 길로 접어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웃을 탓하고 우리만은 예외이리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가족 간에 불화가 시작된 상황에 추석이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던한 세월을 버틴 고희의 청춘은 추석 분위기는 망가졌고 갈 곳이 없어졌다. 일찌감치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아이들과 함께 산소를 미리 찾은 것이다.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는 산소 길, 세월이 그렇게 되었음에 서러웠다. 제사와 재산문제로 가족 간에 남보다도 못한 삶을 많이 보아왔다. 모두가 남의 일인 듯 해던 가족사, 내 일이 되었고 우리 일이 되었다. 풍성한 추석에 갈 곳이 없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언젠가는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세월이 그렇고 흘렀고, 삶의 모습도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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