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내려쬐는 태양볕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누워있다. 여유와 느긋함이 가득한 몸짓이다. 서두름이 없었고 커피 한잔이면 한 나절이 충분했다. 길가에 작은 탁자는 삶의 터전이었고 자신감이 넘치는 발걸음은 너무 부러웠다. 오래전에 찾은 스페인의 풍경이다. 언제 다시 한번 찾아와야지... 긴 세월을 보내고 다시 찾은 거리는 여전히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했다. 와, 이런 곳에서 한 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 오래 전의 기억이다.
세월의 변화에 수긍하듯이 추석을 빌미로 여행길에 올랐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기어이 갈 곳이 없어진 사람, 형님의 장손이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대대로 내려오던 장남의 우선권을 물려받았지만 세월 따라 마음도 변한 모습이다. 번잡하게 생각하는 추석과 설을 넘기고, 부모님 제사만이라도 원했지만 수월치 않다. 재산과 제사로 떠들썩한 가족사가 남의 일인 양했지만, 내 일이 되고 말았으니 수긍할 수밖에. 서러운 세월을 씻어내려 아이들과 함께 떠난 스페인 땅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인천 공항, 세상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 인천 공항이 주는 신선함은 여전했다. 오로지 여행만을 생각해야 하는 공항이 그래서 좋다. 누구의 부름도, 업신여김도 없는 인천공항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버벅대는 발길이 원망스럽지만, 조금 늦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편안하다. 키오스크가 길을 막고 컴퓨터에 숨이 멎지만 더 두려운 건 말이다. 먹을 때만 쓸 수 있는 입, 다시 또 언어의 절벽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먼 비행을 감수하며 도착한 바르셀로나, 여전히 삶은 변함이 없었다. 무릎이 욱신거리고 허리가 뻐근하지만 지중해가 주는 푸근함은 변함이 없다.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도시, 바르셀로나였다.
내리쬐는 지중해의 햇살을 따가웠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안녕했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질서가 숨어 있는 발걸음, 여전히 부러움을 주는 첫인상이다. 오래전에 만났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어 아, 그랬구나!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아이들과 함께 온 여행이기에 편안하고 행복했지만, 많은 걱정이 수반되는 여행이다. 아이들이 알아서 챙겨주고 길을 잡아주는 여행길, 평생을 내가 해 오던 배낭여행이었다. 이젠, 역할이 변해 아이들이 길을 잡고 따라가야 하는 세월이 되었다. 좋기도 하지만 삶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선 시내는 부산했다. 다양한 복장과 걸음으로 활보하는 사람들, 어떻게 저렇게도 다양할 수 있을까?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로지 나만을 위해 걷는 발걸음은 여전히 부러웠다. 걱정도 없이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빵으로 끼니를 메우는 사람들이다. 지지고 볶는 음식대신 간단한 접시에 놓인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근사했다. 옆에 놓인 커피 한 잔은 느긋한 미소를 쥐여 준다. 아이들 덕에 예약한 집에 도착했다. 이것이 개인이 머무는 집이라고? 기십평은 되어 보이는 저택에 기가 죽는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이들도 집 때문에 고생을 하고 가슴을 졸일까? 집 앞에 눈을 돌리다 깜짝 놀랐다.
햇살이 그리운 사람들, 긴 의자에 사람이 누워있다. 남과 여가 구분이 없는 곳, 완전히 벗어던지고 햇살을 맞고 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몸짓에 눈길을 돌려야 했다. 어엿한 주택가에 마련된 수많은 의자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한 그들의 삶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낯선 풍경이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여기가 스페인임을 알려준다. 아이들과 거리 산책에 나섰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그리워서다.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부러웠고 개성 있는 옷차람이 보고 싶었다.
람브라스 거리, 참 사람도 많지만 다양하다. 행동도 독특하고 걸음걸이도 다양하며, 갖춘 모습도 개성이 넘친다. 곳곳에 장식된 거대 조형물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변함이 없다.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길가에 있는 수백 년 살아온 건축물들은 그냥 그 모습이다. 어떻게 저리도 튼튼하게 균형을 맞추어 이루어졌을까? 수백 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듯한 도심이 부러웠다. 인파에 휩쓸리며 흘러가는 물결 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를 망설임 없이 옮기는 발길, 여기에도 사람은 살고 있지만 표정과 삶의 모습은 달라 보였다.
우리의 재래시장인 듯한 시장통, 먹거리가 넘친다. 다양한 색상으로 물들었고 몰려드는 인파는 신이 나있다. 깔끔한 옷차람에 눈이 가고, 거침없는 행동에 부럽기도 했다. 아이들 덕분에 쉬이 주문한 음식, 쉽지 않은 음식이지만 그럴듯했다. 오래전 배낭여행에서의 기억이 떠 오른다. 인도의 번화한 거리에서 주문한 음식, 더듬거리며 시켜 먹던 인도 음식은 불편했다. 낯선 음식문화가 그러했지만 불편한 의사소통에 먹기를 주춤거렸다. 중학교부터 기를 쓰고 매달렸던 언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듣지도 못했고 입은 먹을 때만 필요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나선 영어공부, 언제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들 덕에 호사를 누리는 여행, 언제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여행길이었다. 수많은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거리, 오죽하면 여행을 오지 말라 시위를 했다 하지 않던가? 더는 오지 말라는 여행부자 나라 스페인, 영어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자국 언어만을 고집하고 가끔 등장하는 영어였다. 영어만이 세계 최고의 언어인 듯 매달리던 언어는 스페인어도 있음을 알게 한다. 향긋한 커피로 몸을 헹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포근했다. 왜 이렇게도 바르셀로나에 취해 있는 것일까? 어느새 발길은 숙소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