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리운 엄마 또 아버지

라이킷 124 댓글 1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바람마냥 Oct 12. 2024

아버지의 삶의 무게는 무한이다.

(오래 전의 기억 속 아버지)

갑자기 배가 아프다. 기껏해야 먹은 것은 보리밥에 김치조각이 전부다. 왜 이렇게 배가 아플까? 초가지붕이 이마를 대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병원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동네에 있는 보따리장수가 파는 소화제나 진통제 정도가 유일한 생명줄이다. 어머님은 줄달음질을 치며 보따리장수집을 찾았다. 하얀 종이에 싸여 있는 하얀 가루, 조금은 시큼한 '소다'가루가 따스한 물과 함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언제나 배가 편안해질까를 기다리는 중, 힘든 세월을 살아내시면서 말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등을 내미셨다. 언제도 만날 수 없었던 아버지가 등을 내밀며 업으라는 몸짓이다. 잠시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의 등에 몸을 얹자 따스함이 배를 타고 넘어왔다. 처음으로 만났던 아버지의 넓은 등, 천하에 없는 따스함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따스한 등은 '소다'가루보다 몇 배의 효능을 발휘했다. 아버지의 넓은 등에선 아플 수가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세월은 흘러가면서 아버지의 등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왜 그렇게도 엄하시고 무뚝뚝하셨을까? 감히 말을 건넬 수 없었던 고지식한 아버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이었다. 세월이 성큼 흘러 아이들이 태어났고 어느새 아비의 세월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따스한 등을 내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언제나 아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할 수 있는 인자한 아버지가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아이들과 함께하게 된 세월은 만만치 않았다. 집을 마련해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허덕이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아이들과 어울릴 틈을 주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따스함을 전해 주려 바둥거렸다. 주말이면 전국 곳곳을 보여주고 싶어 고단한 몸으로 나섰고, 함께 놀아 주려 했다. 어린 시절의 단 한 번의 기회, 아버지의 따스한 등이 생각 나서다.

하지만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보지 못한 아들은 따스한 아버지 노릇이 너무 어려웠다. 먹고살기 바쁜 부모님이 전해준 삶의 방법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었다. 학교 길이 그렇고 공부하는 것이 그랬으며, 모든 것의 선택과 실천도 내 몫이었다. 부모님의 큰 보살핌이 있었지만 어린 철부지는 그러려니 하며 세상을 살아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삶은 돌아갔고, 늘 아내에게 아이들의 삶을 떠 넘겼다. 언제나 아버지의 따스한 등을 아내가 해주길 고대했다. 가끔은 직장일로 늦게 귀가한 아내에게 화를 내기도 했고, 다시 후회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스스로 해결하며 착하게 커 주었다. 학교 일도 스스로 해결했고, 먹고 자는 일도 대부분 아이들이 몫이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바쁘고 힘들었을까? 왜 그렇게 아내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했을까?

고지식함과 엄숙하셨던 아버지는 먹고사는 일에 전념이셨다. 몇 마지기의 다락논과 자갈밭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해서다. 늘 들에 나가 일을 하셨으니 고단함에 잠든 아버지는 그러려니 했고, 아버지의 모습은 서서히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삶은 저런 것이구나. 새벽에 나서면 해가 질 무렵까지 무언의 노동으로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심정을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의 삶이 이랬었구나.

나도 모르게 체득한 아버지의 삶은 아이들도 물려받아야 했다.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해 냈고, 아버지의 일과 아이들의 일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다행이다 싶게 아이들의 삶은 무난하지만, 왜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지 못했을까? 조금 더 신경을 써 아버지의 널따란 등이 되어주었으면, 아이들의 삶도 더 따스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아비의 무관심과 상관없이 결혼과 출산으로 삶을 잘 영위해 가고 있다. 전혀 문제없는 듯하지만 아비의 따스함이 부족한 듯해 늘 안쓰럽다. 이제라도 더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단한 농사일로 돌 볼 수 없었던 오래 전의 삶을 나도 모르게 살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월을 감지하지 못한 무지가 가끔은 후회스럽기도 하다. 따스한 등을 내주려 했지만 삶을 핑계로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표현하지 않지만 언뜻언뜻 생각나는 아버지의 따스한 등을 찾았을 것이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무한한 책임감,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그의 무게가 끝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철부지 아비다(2024.10.02 MBC 여성시대 소개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