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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일상 Feb 26. 2022

우리집엔 뱀이 있다.

허물을 벗는 아내

  어느날 부터 우리집엔 뱀이 한마리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 나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이고 나의 아내와 둘 뿐인데 아내가 나 모르게 파충류를 기르는 듯 여기저기 허물이 벗어져 있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 허물의 정체는 놀랍게도 바로 나의 아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넓지 않은 신혼집이지만  나름대로 너무 만족하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지낼수록 한가지 아쉬운건 옷방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뀔때마다 그나마 가까운 친정에서 아내가 가지고 오지 않았던 옷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다보니 아내와 내가 암묵적으로 나누었던 옷걸이에 아내의 옷을 걸어 둘 곳이 마땅치 않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내가 퇴근 후 옷방에 가보면 고스란히 허물 벗듯 옷들이 놓여져 있기 시작한 것이다.


  그 허물을 치우는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였으며 또한 옷 뿐만 아니라 마스크 포장지를 꼭 버리지 않고 그자리에 올려두고 가는 아내의 습관은 허물벗기 2차전이었다.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매번 왜 어지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지?! 하며 아내의 이런 모습이 슬슬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결혼전 집에서는 일체 청소, 빨래, 집안일은 해보질 않고 자라왔던 나는 ‘결혼하면 네가 집안일도 잘하고 해야한다’는 엄마의 걱정과는 다르게 의외로 가정적인 남편의 역할을 잘 해오고 있었고 아내의 허물치우기도 제법 잘해내고 있었지만 어느순간 한번씩 이런 허물들을 보면 한계에 다다를 때가 있었다. 다른 집 부부들도 보면 간혹 이런 문제들로 마찰이 있는 것을 듣긴 했지만 막상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부분이였고 사실 내가 조금만 더 움직이면 되는 일이긴 했기때문에 이야길 꺼내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요즘은 아내가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는데 다먹은 생수통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허물벗기 3차전까지 시작되었다. 매번 ‘빠지직’ 생수병의 포장지를 분리하고 생수병을 찌그러트리며 분리수거하는 일상이 추가 된 것이다. 이렇게 3차례의 허물을 치우는 것이 단 한번도 빠지지 않는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고, 무언가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나에게 뜻밖에도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 아내에게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간에 나에게도 꾸준히 반복하고 있는 일이 있게 해준 것이다. 아내가 나에게 이런 작은 습관부터 길러주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렸을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고나니 아내의 허물들을 치우는일이 어느순간부터 즐거워졌고 그런 아내의 행동이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허물없이 모든 제자리에 치워지고 버려져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에 색다른 활력소라고 생각하고 아내의 허물들을 치우다보면 내가 아내를 위해서 뭔가 한 것 같은 뿌듯함도 밀려온다. 아내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기도 한것 같지만 나의 아내는 칭찬보다는 다양한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며 칭찬을 대신하곤 한다. 나 또한 칭찬의 대가인 괴롭힘이 싫지 않고 너무나 좋다. 이또한 아내만의 애정표현인 것을 알기에 아내의 애정표현 속에 나는 좀더 부지런해져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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