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자의 고양이
사랑스러운 우리 고양이.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이따금 고양이에게 내가 정말 필요한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고양이가 정말 필요하다. 왜냐하면 고양이가 없으면 금세 슬퍼지기 때문이다. 고양이도 나와 같은 기분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내 고양이를 지켜봤는데, 대체로 우리 고양이는 사람을 좋아해서 돌봄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 같긴 하다. 다른 집 고양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고양이는 집 안에 있는지 없는지 도통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던데, 우리 집 사정은 다르다.
먼저 첫째 고양이는 수다쟁이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사람을 오래 관찰하면서 대충 사람 같은 발성을 터득한 것 같다.
그리고 둘째 고양이는 외출중독자다. 날씨만 허락한다면(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가기는 한다. 폭풍우나 최강한파에는 그럭저럭 포기하는 듯) 밖으로,라고 외치며 나가려고 한다.
그러면 나는 테라스 문을 열어주고, 다시 집에 들어간다고 응냥, 이런 소리로 선언하면 문을 친히 열어드린다.
그리고 한 가지, 이어서 할 이야기는 고양이 산책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세상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다소 망설여지는데, 고양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기왕지사 털어놓으려고 한다. 당부하자면 우리 둘째 고양이는 활발한 수컷이지만 번식력을 상실당한 처지이며, 외출 장소는 우리 집 옥상이다.
이 친구는 테라스보다 옥상+계단을 선호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문 열어달라, 돌아왔으니 열어라를 요구한다.
후냥, 응냥, 우훙훙 등 독특한 소리를 내서 나를 조종한다.
우리 집은 옥상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한편 집으로 진입하는 건물 계단이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골목을 지나치는 행인이 봤을 때는 '저기는 왜 집 옆구리에 구멍을 파서 계단을 만들었지?'라고 문득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실 나 역시 우리 집을 처음 봤을 때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고양이는 신나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옥상에 올라가서 포효한다. 고양이(16세)는 이 생활을 거의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몇 번의 탈출과 위기가 있어서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9년 전 봄에는 창문 방충망을 찢고 3층 높이에서 탈출한 적도 있다. 봄에 탈출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주인으로서 참으로 민망하고 외출을 금지시키고 싶기도 했으나, 고양이 나이 16살이면 할아버지다. 그의 운동욕구, 외출을 억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나의 합리화가 오늘날까지도 그의 산책을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두 분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는 매일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작 2마리뿐인데 이 정도로 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으니, 실상은 문지기이고 시중드는 하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나마 이만한 노동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은 고양이들의 자발적 요청이 있어서다. 말하지 못하는 식물은 나의 수중에서 생존해 나갈 수 없다. 그간 세상을 떠난 식물들을 떠올리면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나는 인생사에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수동형 실용주의자인 인간과 살아가는 고양이로서 피로감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나 자신을 실용주의자로 정의한 데는 글자 그대로 연암 박지원과 동일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좀 긴 설명이 되겠는데, 쇼핑을 예를 들어 시작해 보겠다.
나는 원래 물건을 살 때마다 많은 고민을 하는 편이다. 일단 사고자 하는 물건이나 필요한 물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살까, 말까를 5,392번쯤 숙고한다. '산다'고 결정하면 유명 쇼핑 사이트를 검색한다. 검색을 할 때도 몇 가지 조건을 걸어 둔다. 가령 최적가 예산범위를 잡고, 쿠폰 적용, 직구 제외, 렌털 제외 등등을 선택하여 검색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검색결과로 추려진 상품 리스트를 아래로, 아래로 훑고 들어가서 사이즈 보고, 리뷰 보고, 유사상품 재검색하고, 그러다 보면 지쳐버려서 물건을 정작 못 사게 될 때가 있다. 이상한 일이다. 필요한 물건은 사지도 못하고 시간만 쓰고 말다니.
그런 내가 다리를 다쳐 버렸다.
지팡이를 하나 사야 하는데 이마저도 시간이 걸려 버렸다. 당장 지팡이가 없으면 외출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압박을 주어서 구매까지 하루 밖에 안 걸렸다. 쉬운 쇼핑에 속했다.
인터넷 쇼핑은 버거운 숙제다.
차라리 현장 구매가 속이 편할 때도 있다.
쇼핑은 큰 틀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래서 살 물건을 안 살 때도 있다. 저절로 돈이 굳는다는 장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며 이보다 뿌듯한 뜻밖의 절약효과도 없다. 단점은 품위 유지나 패션을 포기하고 수요자들로부터 원성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 집의 주수요자는 아들과 고양이들이다.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쇼핑 사이트를 켜고 응시하게 된다(그런데 알고리즘으로 제시해 주는 건 싫어서, 빅데이터가 골라주는 물건은 피하게 된다. 오기 부릴 때가 아닌데)
남편의 물건은 남편이 알아서 잘 사서 믿고 있다.
남편은 내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고 필수품을 주기적으로 골라 준다. 쇼핑을 어려워하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실용주의자라는 말하는 건 어지간한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산과 시간을 절약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자발적인 적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수동형'이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자 한다.
원치 않게 실용주의자의 고양이로 산다는 건 불안하다.
언제 사료나 모래가 동 날지 모른다. 정기구독을 하면 모래나 사료도 편하게 살 수 있다던데. 나는 나도 모르게 돈이 빠져나가는 시장 구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카카오톡 사진 정리를 안 해서, 네이버 메일 정리를 안 해서 클라우드 사용료를 약 3천 원 정도 지불하고 있지만(어찌 보면 나를 위한 실용주의자가 아닌 부자들을 위한 실용주의자가 되는 것 같다), 이것도 영 찜찜하다. Apple Pay, 삼성페이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재용-젠슨 황-정의선의 깐부치킨 회식 후에는 아무래도 삼성페이는 시작해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저런 부자들도 치맥 하는 세상이다. 나 따위가 수재들이 만든 시스템을 거부해서 좋을 일은 '살면서 불편한 일' 일기장에 '삼성페이'라고 한 줄 더 적고 약 8초 기분전환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전에 갤럭시를 사야 한다는 난관이 있다.
다 시간을 아낀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때때로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고 느낀다.
젠장. 시간.
언제쯤 시간과 비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날 아침, 집 계단과 강한 허그를 시도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정강이 살과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왜 시간에 쫓겨경거망동하게 행동했는가.
나는 후회마저 틈틈이 하는 실용적 자세로 며칠을 보냈다.
'몸뚱이 사정도 생각해야지.'
'사고가 발을 내밀고 걸려라, 걸려라 하는 것처럼 기다렸네. 나쁜 놈.'
'계단은 죄가 없다.'
'남편아, 빨리 돌아와 줘.'
등등
안 그래도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그 시간마저 아껴서 누워있고 싶은 내가 더 완벽한 실용주의자가 돼 버렸다. 이제는 어쩔 도리 없이 누워 있거나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화를 낸다고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화를 내고 싶으니 화를 내야겠다.
무엇에게? 누구에게?
바로 나에게.
심정이 이렇다 보니 정형외과 원장님이 마취 주삿바늘을 상처에 대고 찔렀을 때 나는 입을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났다.
나를 향한 나의 화살은 아플 뿐이다.
진짜 아프더라. 똥 싸고 오길 잘했다, 이 생각이 나를 달랬다.
'야, 너 그래도 오늘 그건 잘했네.'
그날 현명한 선택을 했다면 신한은행 신촌점에 들러 용변을 본 것이다. 신한은행은 좋은 곳이다. 깊이 감사하고 있다.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어떤 경영적 판단으로 그랜드마트 6층에 지점을 내주신 대표에게 감사인사를 드린다.
만약 내가 화장실에 가지 않은 채 정형외과에 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지 말자. 아니,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재미로 상상이나 해보자. 그 고통과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은 100만 뷰 쇼츠감이다. 충격이 상상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다시 쓰러트리는 것만 같았다.
치료를 받은 정형외과로 말할 것 같으면 네이버 리뷰는 그저 그랬다. 별점은 나쁘지 않았는데, 시인성이 떨어지는 알파벳 소문자로 이루어진 아이디의 주인이 같은 리뷰를 반복해서 남긴 흔적이 있었다.
당시 병원을 간절히 찾던 시점에서 그 리뷰 상태를 봤다면 망설임도 뒤따랐을 것이다.
실용주의자로서 리뷰를 검증하지 않고 가려니 내적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온 동네 병원의 리뷰를 확인할 여유가 없고, 화장실이 급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수한 리뷰로 눈길을 끌었던 우리정형외과는 저너머 서강대학교 언덕에 있다는 사실을.
선택의 기로에 섰던 나는 고민했다.
병원인가, 화장실인가.
정강이의 고통인가, 항문의 외침인가.
워런 버핏도 인정할 것이다. 역시, 화장실이다.
그 병원 리뷰 참 괜찮던데, 어떤 환자가 블로그에 수고스럽게 작성했던데, 믿음이 가던데.
내 마음은 서강대 언덕에 있지만, 내 몸은 신촌역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우리정형외과 화장실에 갈 요량에 개미 같은 속도로 언덕을 오르다가 서강대생들이 보는 앞에서 인생 대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결단은 나를 그랜드마트 6층으로 인도했다. 하나의 고통은 해결되었지만 119를 불러도 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만한 상처로 부를 수는 없지. 마음을 다 잡고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연세수정형외과에 당도했을 때는 안도감이 들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피 줄줄 나서 아픈데, 이 타이밍에 왜 똥까지 마려워서 병원에 직행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이런 서글픔,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겨우 UN 로고가 찍힌 막사가 군집한 안전지대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료를 마치고 눈물로 얼룩진 안경을 고쳐 쓰고 밖으로 나오니, 원장님의 환부에 대한 코멘트가 생각났다.
"탈이 나기 쉬운 곳이지요."
"탈이라는 게 무엇이지요?"
"괴사를 말하지요."
"괴사요?"
"탈이 나기 쉬운 곳이니까요."
나는 원장님의 시크한 태도가 혹시 리뷰의 원인은 아닐지 짐작했다.
나야 진짜 아팠는데, 왜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무심하게 말했는가. 괴사라는 단어를 무덤덤하게 말해도 환자는 가슴이 철렁하는데 말이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조금만, 콩알만큼만 섭섭하게 여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했다.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지 않는가.
의사 선생님이 피 철철 나서 아픈 것도 아니고, 못 생겨서 치료해 주기 싫다고 한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은 신속한 판단으로 최선을 다하셨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양이는 또 산책시켜 달라, 문 열어달라 앵앵거린다. 또는 밥그릇을 바꿔 달라, 밥도 새로 달라고 찾아온다.
그 목소리를 향해 나 역시 무심하게 한 마디를 했다.
"탈이 나기 쉬우니 누워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