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바빠도 웃기지

기억이 주는 장단점

by 코알라

“기억나지 않는다.”

진실을 감추는 사람들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말로 종종 매체(또는 현실)에 나온다. 영화 <긴급명령>에도 나온다. 라이언이 비리를 폭로할 것처럼 나오자, 리터는 자신은 면책대상이고 청문회에 불려 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조소를 섞어 말한다.


기억은 책임과 연관되어 있다. 기억한다는 어떤 사안에 대해 책임의식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떤 사안이 있었거나 혹은 없었더라도 당사자가 인지하는 사실이 없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또는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로, 다이소에 반품할 양반김치캔의 행방을 둘러싼 최근 문답을 들 수 있다.

우리 집에서는 원래 물건이 있어야 자리, 지정석을 두고 논쟁을 겪은 적이 별로 없는데, 이날은 반품 마지막 날이라서 신경에 날이 섰다.


나의 주장은 이랬다. “지지난주 남편이 출장 가기 전 긴급 구매한 양반김치캔 중 일부는 반품하기로 결정했고, 그에 따라 남편이 여행용 파우치에 넣어 외투행거 위에 올려뒀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행거 위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나는 그것을 이전시키지 않았으니 남편만이 순전히 그 이전지를 알 것이다.”


이에 대해 남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내가 여행용 파우치에 양반김치캔을 넣어 보관한 것은 맞다. 그러나 행거 위에 그것을 올려둔 기억은 없다. “


기억이 없다.

내가 그랬다, 안 그랬다가 아닌 모호한 말이다. 안개가 낀 사일런트 언덕이다. 이렇게 되면 책임을 묻기가 애매하다. 우선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어서 수색에 돌입하고, 책임은 나중에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양반김치캔을 찾아 헐레벌떡 집을 나서고 나면 책임을 묻기 더 힘들어진다.

적당한 때를 놓쳐서다.


기억은 타이밍이다. 제때 기억나야 하고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도 때를 봐야 한다. 작고하신 홍세화 선생님의 일화가 운 좋게 제때 기억난다. 파리 택시기사 면접시험 중 긴장하여 잘 아는 문제인데도 명쾌하게 즉답하지 못했는데, 극적으로 기억이 떠올라 무사히 합격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기억이 난다는 건 필시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을 굳이 기억해 낸다는 건 괴롭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덮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일이 있고, 그렇기에 삶을 꾸린다는 과업이 버겁고 싫증이 나기도 한다. 주저하고 고민한 후 각오를 다잡고 다시 일상의 트랙에 올라선다. 이 과정은 반복된다.


엄마를 기억한다. 오빠를 기억한다. 이모를 기억한다. 삼촌을 기억한다.

기억을 안고 살아야 기억이 남는다. 이 생각으로 나이 든 고양이를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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