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에게 보내는 헌사
새를 관찰하는, 탐조에 집중하노라면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조차 경솔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옆집 감나무에 먹이를 찾아오는 직박구리 떼는 매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 5~7마리로, 일제히 오기보다는 번갈아가며 다른 나무를 오고 간다. 까치는 그보다 적은 두세 마리가 감을 뜯어먹으러 오는데, 직박구리보다 몸집이 커서 어스름한 날씨에도 알아볼 수 있다. 더구나 울음소리도 다르고, 직박구리의 몸놀림이 한층 가볍고 머리의 깃이 언뜻 보여서 두 새를 구분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나는 주로 안방 창의 방충망, 방풍비닐을 다 열어놓고 집청소를 하며 청소기를 돌리기 전에 새들의 활동을 자세히 본다. 매일 그렇지는 않고, 새소리가 유독 잘 들리는 날에 관찰하게 된다. 탐조라는 단어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 관찰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촬영까지 되는 특수쌍안경에 갑자기 관심이 가는 걸 보면, 나에게도 장비벽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옆집에 감나무가 있는 덕분에 지난 몇 해 간 여러 텃새를 관찰하기 좋았다. 새를 촬영할 정도로 탐조에 애정이 있는 편이 아니라, 남은 기록은 없다. 다만 새 관련하여 몇 가지 일화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새를 무서워하는 조류공포증이 있는 친구가 있어서 문득 생각났는데, 새 이야기를 해도 되려나 싶다. 만약 새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누구든 읽지 않기를 바란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듯이, 새는 사람에게 공포심을 줄 만한 동물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곤충이 있기는 하지만, 새는 하늘과 땅을 오가는 동물로 신화나 전설에도 곧잘 등장하는 상징성이 있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신비롭다면 신비롭고 불길하다면 불길한 구석이 있다.
나는 환공포증이 조금 있어서, 나름 이유가 있을 것 같고 호기심이 생겨, 조류공포증이 있는 친구에게 왜 새가 무서운지 물어봤다. 내 경우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동그라미 또는 다수의 원형이 결집된 형태를 보면 그 형질이 무엇이든 간에 무의식 중에 곤충의 알집이나 감염병에 걸린 피부가 연상되어 갑작스레 심리적 불안감이 생긴다. 친구도 새의 외형이 우선 불쾌하다고 설명했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뾰족한 부리가 튀어나온 모습이나 앙상한 다리, 날카로운 발톱이 기이하기만 한데 그것이 다른 동물의 발가락처럼, 진짜 발가락 행세를 하듯 움직이는 것도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고 덧붙였다. 바다 마을 가까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해변에 찍힌 갈매기떼의 발자국만 봐도 그는 경기하듯 두려워했다고 한다. 치킨도 못 먹고, 명동교자 칼국수를 먹으며 닭육수가 들어간 것 같다고 진저리를 쳤다(젠장, 명동교자를 극찬하며 데리고 가 줄까지 세워 먹인 사람은 나였다). 그가 대도시의 대학교에 다니며 목격한 것 중 손꼽히는 충격적인 장면 또한 비둘기 떼가 거리를 활보하는 광경이었다.
우리 옆집에 새가 제법 놀러 와서 구경하며 재미를 느낀다는 이야기를 아직 그 친구에게 못했다.
그토록 새를 무서워하는데, 구경이고 뭐고, 이야기 들어주다가 트라우마가 생길까 봐 되레 겁이 난다. 아마도, 어딘가에 새 이야기를 하고 싶기는 해서, 이렇게 글로 나마 남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고, 우리 옆집에는 새가 많이 놀러 온다.
새를 무서워하는가, 좋아하는가를 묻는다면 역시 좋아하는 쪽이라고 답할 것 같다. 새의 이목구비는 아기자기하고 손으로 몸을 들어보면 예상보다 가볍다. 깃털도 매끄럽고 뽑혀서 길바닥에 날리는 것을 봤을 때와는 영 다르게 기품 있는 윤기가 흐른다. 맹금류는 다를 것이라 짐작하는 것이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본 새는 단지 참새와 직박구리라서다.
참새는 새끼부터 성조까지 열 번은 만져본 것 같다. 지붕 기와 틈에 해마다 참새가 둥지를 트는데, 아무래도 밖으로 뚫린 자리에 만든 게 아니다 보니 공간이 비좁다는 문제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공간 문제가 있어서 새끼가 눈도 못 뜬 채 추락하여 운명한 일이 많았다. 그러면 죽은 새끼가 자전거 주차자리, 집 올라가는 계단 등에 누워 있고, 발견한 나는 그저 안타까워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파리나 개미의 공격으로 처참해지기 전에 시신을 수습해 주는 것뿐이었다.
막 이사를 왔을 때는 고양이가 테라스에서 두 마리나 참새 성조를 사냥했다. 당시 순이는 몸놀림이 날렵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참새를 물고 들어오는 모습에 충격이 커서, 순이의 사냥실력을 곧바로 칭찬하고 나서지 못했다. 우리는 (사료를 먹으니까)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한들 알아들을 리 없으니, 나는 순이에게 고맙다, 고맙다, 거듭 감사인사를 말하고 먹는 척을 하며 슬쩍 수습했다. 그 일을 두 차례 겪으며, 둘째 고양이는 저도 언젠가는 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 듯 새 관찰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가는 동안 새라는 생명체는 지극히 당연한 존재라서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2018년도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여름날이었다. 더위 끝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동네에 전기가 모조리 나가서 주민들이 밖으로 나와 웅성거렸다. 거리에는 뭔가가 타는 냄새가 났다. 나는 건너편 빌라 뒤편에 직박구리 5마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직박구리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 깃과 가슴털이 매끄럽고 당장 일어나 날아오를 것 같았다. 뜻밖에도 아름다운 새였다. 아마도 공중선에 앉아 있다가 감전되어 운명했다고 여겨졌다.
죽은 새들을 합정역 주변에서도 이따금 목격했다. 합정역의 일부 출구가 통유리로 교체된 후 새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머리를 박는 사고가 일어난 탓이었다. 더구나 비둘기 떼가 상주하는 지역이라 누군가가 모이를 주는 것인지 쌀 같은 곡식이 길바닥에 뿌려지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면 모이를 주우려고 참새 같은 다른 굶주린 새들도 알아차리고 날아든다. 문제는 도로에 떨어진 모이를 주워 먹다가 새가 차에 치이는 사고도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참새들이 위태롭게 도로 위에서 하얀 모이를 허겁지겁 주워 먹는 장면을 보다가, 청신호를 받고 이내 달려온 차량에 연거푸 치이는 사고를 보고 말았다. 차들이 지나간 자리에 참새 깃털이 뒹굴었다. 차도에 들어가 숨을 거둔 듯 구르는 참새를 손수건으로 감싸 달려 나왔다.
죽은 줄 알았던 참새가 사람 손길이 닿자 놀라서 눈을 떴다. 나도 덩달아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살아있는 참새는 뭐랄까, 부드럽고 여렸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약했다. 춥기도 한데 어쩔 줄 몰라서 손이 절로 덜덜 떨렸다. 손수건으로 감싸서 동물병원 앞까지 데려가 슬쩍 들여다 보니, 참새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손수건에 몸을 포개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하는 순간, 참새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높이 뜨다가 휘청 꺾여서 도로에 추락하는가 싶더니, 기운찬 날갯짓으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참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옮겨가며 멀어졌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 가다가 페달질을 멈췄다. 참새 소리가 들리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기도 했다.
그날은 내게 꽤 괜찮은 하루로 기억된다.
초봄 즈음, 이른 시각부터 창가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잦아드는 일이 반복됐다. 그 소리가 신기하게 여겨져 테라스로 나가 살펴보니, 집에 맞붙은 담벼락 구멍에 박새가 둥지를 틀어 새끼들이 부화했던 것이다. 지저귀는 소리의 정체를 알고 나니,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박새 부부의 존재도 곧 알았다. 그러고 나자, 어딘가에 자꾸만 새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나 말이야, 옆집에 감나무가 있어서 새가 많이 놀러 오는데, 참새도 있고 직박구리도 있고 그렇다 등등 까닭 모를 자부심에 차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