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짜장을 던져
몇 해 전 광화문에서 강북삼성병원까지,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시간은 아직 6시가 안 됐지만, 해가 떨어져 시야가 침침했다. 기분은 완전히 심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경교장 근처까지 가서 출출한 배를 달래줄 생각이 들었다. 행인도 뜸했다. 그날따라 가는 곳마다 인기가 없었다.
허전한 계절이 다가왔음을 체감하고, 공화춘이라고 낡은 간판이 내걸린 식당을 찾아 상가 계단을 올랐다.
간짜장 곱빼기를 앞에 끼고 젓가락으로 면발을 양껏 집어 올렸다.
입 안 가득 춘장과 면발이 뒤섞였다. 때 이른 포만감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 전인데도 배가 부른 듯했다. 짬뽕을 언제나 선택했는데, 그날은 짜장이었다. 나는 선택에 만족감을 표했다. 남편은 짜장면에 얽힌 과거담을 들려줬다.
남편이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짜장면은 최고의 외식메뉴였다. 지금도 어린이들에게 짜장면은 인기 있는데, 그때는 별다른 외식거리가 없어서 짜장면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외식은 곧 중국집이라는 공식을 암묵적으로 정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떤 날이었고, 어린이였던 남편과 시어머니는 외출에 나섰다. 그러다 점심을 먹으러 자연스럽게 중국집 문을 열었다.
시어머니는 짜장면을 한 그릇만 주문했다.
어린 아들과 나눠 먹으려던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주인공인 계획에는 변수가 끼기 마련이다. 부쩍 먹성이 좋아진 아들은 어머니가 차례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짜장면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어머니는 갈 길이 바빠 춘장맛만 보고 중국집을 나서야 했다.
‘1인 1 메뉴‘
흰 복사용지에 적힌 ‘규칙’이 음식점 벽에 붙어 있는 풍경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못 살기를 따지면 라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세상살이 풍경이 어릴 적에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
1인 1 메뉴가 험악한 세태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규칙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나는 시선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한 그릇만 주문한 데에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이 있었다는 걸 굳이 주인에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날 어머니는 주문을 거절당하지 않았다. 아이 혼자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없으리라는 계산도 있었고, 적은 양일지라도 나눠 먹으면 서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단지 그 정도 생각이었고, 어머니는 당신의 계산착오만 자책하며 식당에서 나왔다.
주문 매너가 없다 등 꾸지람 같은 규칙에 내몰려 쫓겨난 게 아니었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은 참 가슴 뭉클한
작품이다. 청소년 시절, 조판다 씨가 독후의 감동을 화폭에 잘 담아 교내에 전시되기도 했다. 나는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고 호평했다. 어머니의 아련한 눈빛,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 차가운 겨울 같은 가난을 이고 온기에 이끌려 식당 문을 연 장면이 원작을 찢고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원제는 우동 한 그릇이 아니라, 소바 한 그릇이다.”
내가 호평을 담아 사족을 달아주자, 조 작가는 자기 감성이 파괴당한 것에 대해 아픔을 느끼며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와 다른 맥락에서, 근래 새삼 혼자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복수로 동반하여 음식 주문은 단 한 그릇만 시킨 것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비매너에 맘충 낙인까지 찍힐 사건이다. 쇼츠 타고, 커뮤니티에 올리고. 요리 돌리고 조리 돌리고.
하지만 소설 속 이야기라는 건 비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감동이 있다.
<그린 북>, <히든 피겨스>, <헬프> 등 유색인종차별 관련 영화도 대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편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비범하고도 처절한 노력에 울림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거리 음식점에 붙은 노키즈존 마크를 보며 비참한 울림을 느꼈다.
개, 고양이(길고양이도 포함)는 들어갈 수 있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어린이는 그럴 자격이 없다.
왜?
나는 그것이 세태라는 것을, 현실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유는 모른다. 그들은 자기 어린 시절의 과거 사진에도 침을 뱉을 수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온 어린 차은우를 문전박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은 차별은 분명히 있다.
여자는 여자 화장실에 가고, 남자는 남자 화장실에 가는 것이다. 내가 아는 좋은 차별이다.
그러므로 시류에 짜장이라도 던져 넣고 싶다. 물을 흐려버리겠다. 떳떳이 먹지도 못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속에 던져 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