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에게 받은 위로.

-걷다가 음악 듣다가.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by 코알라

아침부터 오후까지 반팔로 돌아다녀도 쌀쌀함이 느껴지지 않는 '여름 전야제' 같은 금요일이었다.

입을 기회가 몇 번 더 남았을 거라며 세탁소에 맡기지 않은 니트와 두꺼운 긴 팔 티셔츠들이 여전히 옷장에 가득한데 이대로라면 여름옷들로의 교체를 서둘러야 될 듯하다.


보건증이 필요한 일이 생겨 지난주 보건소를 방문했다.

문득 궁금해진 '내 인생 첫 보건소 방문날'을 찾기 위해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월을 헤아려보니 15년이나 더 지난 일이었다는 사실에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은 서글픔에 잠시 멍해졌다.

취업 준비하며 용돈 벌이로 시작한 던킨 도너츠 아르바이트를 위해 그때도 지금과 같이 보건증 발급을 목적으로 보건소를 방문했었다.


그러고 보면 대학생이 되자마자 주말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방학 때는 집 근처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쉼 없이 돈을 벌었다.

엄마가 주는 용돈으론 턱없이 부족했던 꾸미기 좋아하는 20대 대학생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하고 살려면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20살 때부터 39살까지 쉬지 않고 돈을 벌어왔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짠하고 대견했다.



발급된 보건증을 수령하고 보건소에서 나와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라 걸어가 보자 싶어 가다 보니 3월 말 만개한 벚꽃을 구경하러 왔던 동촌 유원지의 벚꽃꽃나무길이 나왔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길 양 옆으로 가득했던 연핑크의 벚꽃 잎은 꿈처럼 사라졌고 초록빛 나뭇잎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푸르른 나무들만으로도 '봄의 쇼타임'이 지나갔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온통 벚꽃이었던 이 길의 주인이 바뀌었다.




다른 날과 달리 라디오 대신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익숙한 노래들을 듣는 습관이 있는데, 이 날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의 원인으로 갑갑함까지 더 해진 날이었다.


서둘러 나온 덕에 여유도 있겠다 푸른 나뭇잎들이나 실컷 구경하며 힐링이나 하자 싶어 벤치에 앉았다.

벚꽃 길 드문 드문 놓인 벤치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해 있던 내 정신을 붙드는 노래 가사가 순간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한참 듣고 있던 익숙한 노래들 사이를 비집고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처음 들어보는 노래의 가사말에 휴대폰을 꺼내 노래 제목을 확인했다. 목소리는 아이유임이 확실했다.

'아이와 나의 바다...?'

아이유를 좋아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노래 제목이었다.


"누나, 열심히 벌어서 나도 내 카페 할 거야."

지난주 26살이 된 사촌 동생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자신의 인생 목표를 알렸다.

가수가 될 거라며 명절 때 친척들과 함께 간 노래방에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대던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느새 다른 꿈이 생겨 있었다.


"그래,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사촌 동생에게 응원을 건네고 있지만 사실 속으론 그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래, 넌 꿈이 스무 번 바뀌어도 될 청춘이지.
뭘 해도 예쁜 나이, 뭘 해도 되는 나이, 몇 번을 실패해도 되는 나이...
네가 그런 나이지.'

단 한 줄의 노래 가사가 지난주 사촌동생에게 느낀 부러움을 다시 끄집어내며 지금의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린아이였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고작 이렇게 밖에 살고 있지 않는 거냐며 가슴 치며 후회하고, 속상해하고, 원망하진 않을까?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다시 그 한 밑천을 받아 들고 꿈을 여러 번 바꿔보기도 하고, 후회 없이 한 가지에 미친 듯 집착해보고도 싶었다.


"그럼 뭐 해, 이미 난 그 청춘을 지나왔다고..."

내 혼잣말을 들은 듯 아이유가 대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맬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갑자기 눈물이 났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예뻐서, 흔들리는 강물에 부딪혀 반짝이는 햇살이 예뻐서.

어떤 일이든 헤매도 된다고, 이미 겪어본 여러 번의 경험들로 돌아오는 길을 아니까 괜찮다고.

그러니 나약한 생각 그만하고 뭐든 해보라고. 넌, 아름다운 마흔이라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계속 눈물을 흘렀다. 훌쩍이는 소리가 크게 났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아이유 덕분에 눈물이 났고, 눈물이 난 덕분에 알 수 없는 불안과 갑갑함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아이고~ 학생 운다 울어. 와 우노."

옆 벤치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며 혼잣말인 듯 물었다.

"친구랑 싸웠어요."

그 와중에 울먹이며 거짓말 하는 내가 웃겼다.

아주머니 눈에 나는 아직 학생인가 보다.

아주머니 눈에 나는 아직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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