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보다 라일락이 더 좋다.

-꽃구경. 어린 시절의 그리운 향수.

by 코알라

"잠깐!! 잠깐만!! 이거 무슨 냄새지?"

"무슨 냄새? 어디서 똥냄새 나? 난 안 나는데?"

"아니 아니! 냄새가 아니고 향기! 이거슨 라일락 향이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벚꽃나무 거리를 걷던 중 어디선가 연하게 라일락 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그러니까 지난주까지의 대구는 활짝 핀 벚꽃들로 온 거리가 황홀하게 물들어 있었다.

꽃구경 가자는 말을 잘하지 않던 J도 이번 주 주말엔 벚꽃 보러 가자며 신신당부를 할 정도니, 벚꽃만큼 전 국민에게 나들이를 하고 싶게 만드는 꽃은 없을 것이다.


벚꽃은 낮에 봐도 예쁘지만 밤에 봐도 예쁘다. 그래서 벚꽃나무가 있는 곳이면 밤낮없이 사람들이 붐빈다.

다른 의미지만, 조용하던 밤거리가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면 왠지 안심되고 기분이 좋다. 늦은 시간의 귀갓길이 무섭거나 외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 점심을 먹고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만개한 벚꽃나무 거리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벚꽃 나무 아래에서 각종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고, 연인의 인생 샷을 건져내기 위해 스쿼트 자세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저 나무 예쁘네, 저기 가서 서 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하는 J의 성격 상 해야만 끝나는 일임을 알기에 군말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나무 앞에 섰다.

얼굴이 작아 보이도록 양손을 양 뺨에 대고 눈을 동그랗게 떠보기도 하고, 사진 찍고 있는 걸 몰랐다는 듯 사선으로 다른 곳을 응시해보기도 하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각종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중 가장 걸작은 얼굴이 아예 보이지 않는, 걷는 척하고 있는 뒷모습의 사진이었다.

역시 얼굴이 안 나와야 한다.


"이제 그만 찍어!"

남들 앞에선 화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끝을 모르는 J의 지독함은 가끔씩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든다. 결국 나무 나무마다 자세를 취해보라며 사진을 찍어 대는 그의 집착은 오늘도 나의 언성을 높이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개코 레이더망에 들어온 라일락 꽃 향기.
분명 이 향은 라일락이었다.


그만 놀고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고함 소리가 들리기 전, 친구들과 땅따먹기와 고무줄을 하며 놀던 동네 골목길엔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골목 라인을 따라 빼곡히 심어져 있던 라일락 꽃나무에서 퍼지는 은은한 향은 보랏빛 꽃잎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또래보다 키가 작던 탓에 단계가 오를수록 높아지는 고무줄의 높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제일 먼저 경쟁에서 낙오되던 나였는데, 향기에 취한 것인지 이상하게 이 골목에서 고무줄을 하면 꽤 오래 버텨내곤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무줄을 하다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갈 때쯤이면 숨을 힘껏 끌어당겨 마시며 마지막으로 라일락 향기를 들이마셨다.

아무리 들이마시고 들이마셔도 과하지 않는 라일락 향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처럼 어린 시절 봄이면 어디서든 느껴지던 라일락 꽃향이었는데, 문득 어디서든 라일락 꽃향을 맡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 건 대학생 때였다.

골목마다 피어있던 보랏빛 꽃잎은 점점 찾기 힘들어졌고, 어느새 실존했던 꽃나무였던가 싶을 정도로 나에겐 유니콘처럼 환상의 존재로 여겨졌다.


"라일락 꽃 요즘 본 적 있어?"

"아니? 그러고 보니 보기 힘드네? 향이 참 좋았는데..."

봄만 되면 라일락 꽃나무의 행방을 친구들에게 묻곤 하는데, 그들도 나와 같이 어린 시절 흔히 볼 수 있던 라일락 꽃나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수많은 벚꽃나무들 사이사이 향기의 근원을 찾기 위해 거북목이 되든 말든 목을 쭉 내밀고 향을 쫓았다.

가끔 아카시아 나무와 라일락 꽃나무의 향을 헷갈리기도 했지만, 이건 분명 라일락 꽃향기였다.

"잘못 맡은 거겠지, 벚꽃 사이에 생뚱맞게 왜 라일락 향기가 나냐?"

J의 부정에도 포기하지 않고 킁킁 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집중하지 않으면 지나칠 구석 언저리, 분홍빛 벚꽃잎들 사이에 연보라색의 라일락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봐봐! 있잖아!!"

라일락 꽃나무가 분명했다. 어린 시절 고무줄 하던 그 골목으로 나를 소환시키는 추억의 향기.


한 그루라 더 반가웠던 라일락 꽃나무


환영받고 예쁨 받는 큰 벚꽃나무들 사이 '투명나무' 취급을 받으며 동족 없이 외로이 꿋꿋이 피어있던 한 그루의 라일락 꽃나무.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몰랐던 한 그루의 라일락 꽃나무.

단 한 그루지만 뿜어내는 외유내강의 향기는 여전하다.


"우리 기억했다가 내년 봄에 다시 여기 라일락 나무 보러 또 오자."

"그래, 우리만 아는."

라일락 나무에 대한 추억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이 좋다.

벚꽃에게는 미안하지만, 올해 봄 나의 픽은 내가 발견한 단 한 그루의 이 라일락 꽃나무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카페에 함께 가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좋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