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니?
따뜻한 햇살, 깨끗한 가을 하늘, 눈을 즐겁게 만드는 단풍을 창문을 통해서 보고 있자니 뭔가 아쉬웠다.
'자전거나 타러 나갈까?'
늘 자전거는 J와 함께 탔었는데 '가을'이 하도 나를 불러대는 통에 이날은 혼자서 자전거를 끌고 산책로로 향했다.
-좌회전 우회전 단디 보면서 타고 와.
한 번은 뒤에서 세게 달려오는 자전거가 나를 추월하려다 충돌해 심하게 넘어진 적이 있다.
앞지르려면 크락션을 울리던가. 어떤 사람들은 "지나갈게요."라고 외쳐주던데 이 아저씨는 소리소문 없이 추월하려 했다.
넘어진 순간에도 자전거 도로에 대자로 뻗어버린 수치스러움과 손바닥 무릎 다 까져 쓰라린 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 아저씨와 한 바탕 싸울 것 같은 화가 미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J였다.
행여 싸움으로 번질까 걱정돼 손바닥과 무릎에서 피가 나도 "그만 가자, 됐어. 나 괜찮아." 하며 어르고 달래 재빨리 사고현장을 벗어났었다.
-알겠어. 천천히 잘 살피며 탈게.
이어폰을 한 개씩 나눠 끼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풍경을 보며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좋지만 오롯이 혼자서 모든 걸 독점하는 것도 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Km 정도 지나와 목도 축이고 숨도 고를 겸 고가다리 밑 벤치에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J와 함께 자전거를 탈 때도 자주 쉬어 가던 곳이다.
텀블러에 담아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 시원타~"
립글로스를 바르고 나온 탓에 하얀색 텀블러에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버렸다.
언젠가 J가 자기 입술은 도톰하니 복스러워 먹을 복이 많다고 자랑했다.
그때마다 입술 도톰한 걸로 따지면 나도 빠지지 않는다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고, J는 "네 입술은 똥집이고 내 입술은 복스러운 거야!"라 했다.
사실 어릴 땐 친구들이 남들보다 두꺼운 내 입술을 '순대'라며 자주 놀렸다.
립스틱을 입술의 반만 발라 최대한 얇아 보이도록 노력하며 살았는데 J는 나와 반대로 입술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의 두터운 입술을 복스럽다 자랑해 댈 때마다 '뻔뻔하다, 미의 기준이 희한하다' 싶었는데 이젠 덩달아 내 입술도 복스럽게 느껴진다.
이젠 아무리 '순대', '입술 한 바가지'라 친구들이 놀려대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상처받지 않는다.
텀블러에 찍혀있는 입술 자국을 보며 '어린 시절 콤플렉스였던 내 입술이 지금은 예뻐 보이는구나.'라며 감성에 젖은 나는 폰을 꺼내 들어 J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때? 내 입술 섹시하지? 훗.
-ㅋㅋㅋ이씨!!
그래, 그럼 그렇지! 네가 좋은 말 해 줄 놈이 아니지.
J는 늘 이런 식이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 기똥차게 그 포인트를 지나친다.
사진을 키워 유심히 보니 깨금발 짚고 있는 내 발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보라는 건 보지 않고, 대답하라는 건 하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놈이다.
한 번은 J를 불러다 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알면서 왜 그 말만 안 해줘?"
"재밌잖아."
"내가 듣기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그 말만 골라서 하는 거야?"
"재밌잖아."
"너만 재밌으면 돼? 내 기분 상하는 건 생각 안 해?"
"나는 너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진지하게 물을 땐 제발 장난 좀 치지 마! 알겠지?"
"하... 미안해, 그건 힘들 것 같아."
"뭐가 힘들다는 거야?"
"너만 보면 놀리고 싶은데 어떡하라고~ 네가 포기해."
뭐가 이리도 당당한지.
큰 소리로 놀려대기, 고무줄 끊기, 아이스께끼 하고 도망가기......
좋아하는 이성에게 장난부터 치고 보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게 새삼 실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