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전공 문제집을 들여다보곤 하는데, 10년이나 지나버린 이젠 필요 없는 중국어 관련 문제집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 이유는 거기에 남겨져 있는 '나와 우리의 낙서'들을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주고받은 낙서들의 휘갈김 정도, 글자의 기울기와 농도만 보아도 그 당시 우리의 모습을 진하게 떠오르게 하니 '기록'의 힘은 역시 대단하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중국학과는 3학년 2학기의 학점은 자매결연 맺은 중국 북경의 대학교에서 이수를 해야 했었기에 나는 한 학기를 중국 북경에서 보내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의 첫사랑도 시작되었다.
별 것 아닌 것들에 웃음 나고, 괜히 서성이게 되고 기다리게 되고, 설레었던 함께한 순간들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곱씹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생각하던 그때의 나는 현실적 고민들은 모두 저 뒤로 넘겨버렸기에 '혹시 지금 내가 천국에 와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사 제쳐놓고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몰두했던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젠 만사를 제칠수 없어져버린 지금의 나에겐 다행스럽다.
누구에게나 보상과도 같은 인생의 한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나에겐 중국 북경에서의 6개월이 그 순간이다.
'해봤자 되겠어.'
유난히 나 스스로에게 자신 없던 시절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도 모든 것이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노력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한 선배 몇 명과 함께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진짜 이쁘다. 저렇게 이쁘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여자 주인공인 배우 한가인을 보며 조용히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옆으로 돌아봤더니, 나의 첫사랑이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왜 드라마는 안 보고 나를 보고 있냐고 나의 첫사랑에게 물었다.
"너는 너고, 연예인은 연예인이야."
"네?"
"이쁜 게 매력이니까 연예인 하는 거고, 너도 너만의 매력이 있는 거야. 부러워하지 마.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TV 볼 거면 TV 꺼버려."
"그냥 한 말인데, 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진지해져 버린 상황이 어색해 웃어넘겼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그날 나 몰래 적어둔 첫사랑의 짧은 낙서.
'너도 이뻐.'
'누구랑도 비교하지 마.'
내가 나의 첫사랑을 좋아했던 이유는 늘 나를 '이쁘다, 이쁘다' 해줘서였고, 늘 나에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해줘서였다. 나의 첫사랑과 함께 있으면 난 늘 이뻤고, 늘 할 수 있었다.
이젠 너무 낡아버린 중국어 문제집들을 버려야 하지 않냐며,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라는 엄마의 명령에 책장의 문제집들을 훑어보다가 생각난 내 첫사랑의 기억.
역시 아무리 정리하려 해도 버릴 건 없다.
문제집 속의 문제와 해답들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져 버렸지만 그 안에 기록된 나와 우리의 낙서들이 가끔은 인생의 답을 찾아내기 위한 힘이 되어 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