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책 읽기, 생각보다 괜찮다.

-도서. '계절 산문'을 읽고.

by 코알라

나는 매 달 책을 구입하는 습관이 있다.

한 권의 책을 끝내고 다시 읽기를 시작할 신상책이 집에 구비되어 있지 않는 상황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책과 커피는 내 삶에 너무나 중요한 먹거리들이기 때문에 고정 수입이 사라진 지금은 다른 곳의 지출을 줄여서라도 계속 누리고 싶은 나의 사치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 정도가 지난 5월 중순, 친하게 지내던 직장동료와 번개로 저녁식사 약속이 잡혔다.

비가 오는 날 내가 나가는 것인지 내가 나가게 되어 비가 오는 것인지... 이 날도 비가 왔다.

평소에 나는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니는데, 언제 어디서든 짬이 나면 책을 읽기 위해서다.

책 장에서 빗소리와 어울릴 만한 신상책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박 준 시인의 '계절 산문'이라는 책이었다.


걷고 싶어서 약속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출발했는데, 비 오는 금요일이라 퇴근 길이 평소보다 더 막혀 늦을 듯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식당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그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고, 그렇다고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까지는 아닌, 애매한 빈틈이 생겨버렸다.

멈춰 선 갈림길 앞에 작은 놀이터가 보였고, 놀이터 앞쪽에는 지붕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는 휴게공간도 있었다. 비로 인해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고요했고 덕분에 책 읽기 딱 좋은 장소였다.


CORDHKS.png 책 읽던 그날의 놀이터(좌) 그날의 '시작'(우)


"놀이터까지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기다리고 있을 놀이터 위치를 회사 후배에게 알려주며,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체크했다.

'계절 산문' 은 한 장 또는 두 장 분량의 짧은 산문들로 모여진 산문집이다.

쌓여가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 감성 충만해지고 싶을 때, 외로움을 즐기고 싶을 때 나는 주로 산문집을 읽는다.


시작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그동안 익숙했던 시간과 공간을 얼마쯤 비우고 내어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시작' 글 중에서-


회사를 그만둔 것은 이직이나 대학원 진학 등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잔병치레와 스트레스로 인해 피폐해져 가는 나만을 위한 결정이었고, 그만두기만 하면 바로 건강을 되찾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나의 심신은 잔병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까지 얹힌 내 일상은 걱정 투성이었다.


익숙했던 것으로의 헤어짐, 그것이 완전히 끝나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이 글은 고요한 놀이터, 행인의 젖은 발소리, 눅눅한 책의 종이질과 더해져 몇 배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책은 마치 지금의 내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깜짝 놀랄 정도의 공감과 위로를 주곤 한다. 그 순간은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필요 없게 된다.


사람에게 큰 병은 힘들고 버겁기만 하지만, 감기나 몸살 같은 잔병은 나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잔병은 먼저 사람을 쉬게 합니다.
-'팔월 산문' 글 중에서-


'계절 산문'을 다 읽은 지 3개월이 지났다.

나의 잔병은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잉여스러움이 죄스러움으로 느껴지려 할 때면, 비 오던 놀이터를 생각하며 '계절 산문'을 집어 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때 교보문고에서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