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발단은 대파였다.

-도서. '심심과 열심'을 읽다가.

by 코알라

커피를 과하게 마시지도, 낮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고, 이때를 대비해서 침대 한편에 놓아둔 비상용 책을 펼쳤다.

한참을 글 따라 흘려가던 내 눈이 어느 한 문단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그 문단을 곱씹어 읽고 있었다. 지난주 J와의 싸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싸운 게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지."

이 글을 봤다면 J는 늘 그러는 것처럼 '싸움'이라는 단어를 '일방적 당함'이라고 정정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대하는 모습 그대로 남을 대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충고와 비판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모진 사람이에요.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남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어요.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김신회 씨가 직접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김신회 씨를 제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요."
-p.172 글 중에서-


발단은 대파였다. 함께 걷기 운동을 끝내고 식재료를 사러 만보 공원 근처 자주 가던 마트에 들렀다. 늘 싱싱한 채소들이 한가득이었는데 이 날따라 대파가 시들했다. 진열된 모든 대파를 다 확인한 J는 도저히 대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가는 길에 동네 마트에도 가보자 했다. 대파를 제외한 식재료들을 구입한 후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러 하드 12개와 투게더 한 통을 사서 동네 마트로 향했다.


"주차할 곳이 없네, 내가 내려서 대파 살 테니 근처 주차할 곳 찾아보고 있어."

추석 연휴 전이라 그런지 동네 마트의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고, 얼른 나만 마트에 들러 대파를 사 올 생각이었다.

동네 마트의 채소 상태도 이전 마트와 비슷했고, 고르고 골라 최대한 상태가 좋은 대파를 집어 들어 계산대로 가려는데 J가 마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 싱싱하잖아, 잘 고른 거 맞아?"

식재료엔 특히 더 깐깐한 그는 내가 고른 대파를 다시 내려놓고 진열된 대파들을 죄다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모든 대파를 다 확인하고 나서야 별반 다를 게 없는 대파의 상태에 포기한 듯, 게 중에 하나를 골라 나에게 건넸다. 계산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계산대로 향했고, 정신없이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고 있는 점원에게 대파를 건넸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고 금액을 부르는 순간, 저 멀리서 J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계산하지 마. 취소해!! 취소하고 이리로 와 봐."

하... 습관인 것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J는 계산하려던 찰나 몇 번이나 계산을 번복했던 이력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그런 그를 대신해 점원에게 사과하는 건 내 몫이었다.


"이것 봐!! 여기 대파 더 싱싱해!"

마트 옆 채소가게에 진열된 대파들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사자."

나는 짜증을 숨기며 대답했다.

"사실 거예요?"

우리의 대화를 듣던 가게 사장님이 안쪽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검은 봉지 하나를 집어 들고 대파가 있는 진열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근데 이것 봐. 대파 대가 짧네, 하얀 대가 얼마 없어."

"드릴까요?"

"대가 짧네... 이러면 별로인데..."

결정자인 J는 지금 이 순간 그와 대파만 존재하고 있는 듯 사장님의 물음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대파만 보고 있었다. 나의 한계는 이까지인 듯했다.

"대충 좀 사!! 다 똑같잖아!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고!!"

나도 모르게 아이스크림을 핑계 삼아 소리쳤다. 놀란 J는 손에 들고 있던 대파들을 모두 내려놓았고, 가게 사장님은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좋게 말하면 되지. 왜 맨날 그렇게 화를 내?"

"내가 화를 안내면 네가 들어주지도 않잖아. 무슨 대파 하나 사는데 3군데나 돌아다녀. 그리고 내가 채소가게에서 바로 대파를 샀으면 말을 안 해. 거기서도 대가 짧네 마네. 뭘 어쩌겠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거 사려고 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남들 앞에서 소리 지를 만큼 화나는 일이야? 왜 이렇게 화가 많아?"

"넌 왜 너밖에 몰라!"

결국 다시 동네 마트로 가서 내가 계산하려 했던 그 대파를 샀고, 오는 내내 이해되지 않았던 서로의 행동들에 대해 격정적으로 토론했다. 차 안에선 서로에게 퍼부어대는 고성이 한참 오갔고, 우리의 고성은 융화되지 않고 평행선을 걸었다.


늘 J는 나에게 왜 이렇게 화가 많냐고 한다.

그 말에, 늘 나는 화를 안내면 들어주지도 않지 않냐며 반박한다.

나라고 왜 화만 내고 싶겠는가? 나도 싸우는 게 싫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나의 이해(理解)가 크면 클수록 J는 더 본인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삼 세 번을 참았어! 난 참고 참다가 얘기하는 거라고!"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늘 세 번 참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넌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참으려는 노력을 한 적이나 있느냐고 나의 화에 대한 정당함을 어필했다.


그런데 이 책의 말처럼, 나에게 너그럽지 않기 때문에 J에게도 너그럽지 않았던 것일 수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나에게 관대하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에선 삼(三) 세 번의 기회를 부여한다. 삼(三) 세 번의 범위 안에서는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인 양 나의 의견을 취소하면서까지 부단히 타인을 이해하려고, 아니 타인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겐 삼(三) 세 번이 없다.

나는 무조건 처음부터 잘해야 하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처음에서 미끄러지면 내가 재주가 없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기도 한다. 스스로에겐 재차 기회를 주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나를 대하 듯, 나와 가장 가까운 J에게 인색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 남들 앞에서 소리친 건 내가 잘못한 거야.'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인데, 나는 그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마트만 가면 눈이 돌아가는 그인데, 하나 있는 그의 취미를 여유 있게 지켜봐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니, 대파 하나도 좋은 게 사고 싶었던 건데...'

뒤늦은 이해가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J를 너그럽게 대하면 나를 너그럽게 대할 준비가 된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강박들에서 벗어나고자 J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보기로 했다.




글 쓰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작가의 프롤로그를 읽고 글 쓰기 시작한 나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구입한 책인데, 의도하지 않게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하긴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 내 주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글 쓰기를 위해선 당연한 깨달음일 수도.


읽다가 밑줄 쫙. 사진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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