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강의를 듣고 있다.
유익한 강의를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어 백화점 아카데미센터의 강좌검색을 자주 하는 편이다. 끌리는 주제의 강좌를 발견하면 강의계획서와 커리큘럼을 훑어보는데, '토론' 이 포함되어 있는 수업은 아무리 주제가 마음에 들어도 얄짤없이 포기하고 돌아선다.
왜냐하면, 나는 '듣는 강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그냥 나는 '듣는 수업'을 좋아하는 성격일 뿐이다.
강의 시간엔 선생님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들을 필기하고 듣는 것에 집중한다. 수업이 끝난 후, 엉망으로 갈겨놓은 필기들을 중요도에 따라 색을 들여가며 정리한다. 필기를 정리하다 보면 내 머릿속도 함께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러다 궁금해지는 것이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해보거나 책을 찾아본다. 이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텐데, 나는 사실 아무리 궁금해도 질문을 못하는 성격이다. 궁금하면 궁금한 대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대로 놔두거나, 찾아보거나, 엄한 사람에게 물어대어 귀찮게 할 뿐이다.
무료한 기분이 싫어 즉흥적으로 화가 마르크 샤갈의 인생에 대한 특강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미술에 큰 관심은 없지만, 미술에 관련된 강의는 웬만해선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맘 편히 신청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강의실을 나가지 않고 책을 주섬주섬 꺼내어 강사님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을 발견했고, 검색해보니 오늘 나에게 화가 샤갈의 인생을 멋지게 강의해 준 강사님이 도슨트 정우철이라는 매우 유명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사인이라도 받아둘걸' 뒤늦게 후회하며 도슨트 정우철의 책이나 강연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술사나 미술화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번 가을학기 아카데미센터의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강의도 신청하게 되었다.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나를 들뜨게 해 주었다.
내가 듣고 있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강의는 화요일 오전 12시 30분부터이다. 직장인이었다면 언감생심 신청하지 못할 시간대의 수업이었을 텐데 벌써 3주 차 수업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생각보다 수업을 듣는 연령대는 다양했다. 걱정했던 것처럼 수업을 듣는 학생이 적지도 않았고, 내가 제일 어리지도 않았다. 강의실은 늘 만석이고, 나눠준 프린트물에 열정적으로 수업내용을 필기하고 있는 것도 나뿐만이 아니었다. 본인이 잘못 알고 있었던 미술사 지식을 강사님께 다시 확인받고자 질문하시는 50대 여성분도 계시고, 수업시간에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을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필기하는 40대 여성분도 계신다. 깜박하고 프린트물을 챙겨 오지 않은 분을 위해 자신의 프린트물을 함께 보자며 먼저 다가가 주시는 분도 계시고, 2시간 이상 강의하시는 강사님을 위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전해드리는 따뜻한 분도 계신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연령대는 달라졌지만, 배우고자 하는 모습은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그리고 일반인 학생이든 다 똑같은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토론도 없고 강의 주제도 마음에 들지만 무리 중에 내가 튀진 않을까 근거 없는 걱정을 해대며 강의 신청을 망설이던 순간들이 있다. 왜 이 강의가 듣고 싶은지 이유를 찾지 못해서인 듯하다.
열정적이기엔 이 배움의 목표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난 참 못난 찌질이가 확실하다.
꼭 수료증을 받아야 하는가?
꼭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꼭 이력서에 기입될 수 있는 사항이어야만 하는가?
이딴 생각이야말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이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 듯, 나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만족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조금씩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면, 나를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