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남동생의 패딩을 이제 그만 사 왔으면 좋겠다.
-좋은 기억만 남기를 바라는 딸의 마음.
"네 동생 패딩 하나 샀어, 마침 세일하길래. 지난주에 집에 왔을 때 보니 얘가 추워 보이더라고..."
백화점 종이 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엄마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 예쁜 거 잘 샀네."
별생각 없이 대답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남동생의 패딩을 사 올 수밖에 없었던 변명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나를 설득시키고자 했다.
"넌 옷 많잖아~ 네 동생은 내가 안 사주면 옷을 아예 안 사잖니."
"알겠어. 누가 뭐래? 난 아무렇지 않은데 왜 그래?"
'넌 옷 많잖아.'라는 말에 괜히 발끈하며 툴툴댔다.
"엄마는 네 동생 군대 입대하는 날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속이 상해서..."
또 시작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엄마에겐 어제 일과도 같이 선명한 남동생의 얇은 점퍼 이야기.
"엄마, 낡디 낡은 옛날 일은 이제 그만 잊고 살아~ 정작 본인은 기억도 안 난다는데 왜 그래? 걔가 옷 살 돈이 없어서 안 사겠어? 나보다 더 잘 벌어!"
"그래도 엄마 마음이 그게 아니야."
또 나왔다, 엄마의 말버릇.
10년도 넘은 캐캐묵은 이야기이다.
남동생이 군대 가던 날은 1월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중국 교환학생으로 가 있던 나는 일부러 동생 배웅을 위해 교수님께 말씀드려 다른 애들보다 일찍 귀국했다.
귀국한 그날 저녁, 동생은 친구와 함께 입대할 예정이라 아빠 엄마와 함께 친구 부모님의 차를 타고 훈련소까지 갈 거라 했다. 그 차에 내 몸을 실을 여분의 자리도 없는데 왜 오버해서 일찍 귀국했냐며 놀려댔고, 왜 진작 그 얘길 하지 않아서 혼자만 덜렁 귀국하게 만들었냐며 입은 뒀다 어디에 써먹을 거냐며 남동생과 말다툼을 했다.
그렇게 아빠와 엄마만 훈련소까지 배웅을 다녀왔고, 저녁쯤 집에 도착한 엄마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왠지 오는 길에 아빠랑 한바탕 말다툼을 한 듯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긴 싫어 물어보진 않았다.
며칠 뒤, 엄마가 당분간 입을 일 없음이 분명한 군대 간 남동생의 패딩을 사 왔다.
"엄마, 입지도 못 할 군대 간 애 패딩을 왜 사 왔어?"
"휴가 나오면 입으라고 할 거야."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훈련소로 가기 위해 남동생 친구와 친구 부모님을 만났던 그날 새벽, 남동생 친구의 어머니가 내 동생이 입은 점퍼를 보고 한 말이 발단이 되었다.
"어휴, 안 춥니? 이 추운 날 입기엔 좀 얇은 점퍼 같은데?"
"네, 안 추워요. 얇은 옷을 겹겹이 입어야 더 따듯하대요. 두꺼운 점퍼는 몸이 둔해져서 싫어요."
누군가 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다면 그저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말 일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친구 엄마가 네 동생 보고 얇은 거 입고 왔다고 혀를 차는데, 어찌나 속상하던지... 추운 겨울에 군대 가는 애한테 두툼한 패딩 하나 사줄 생각도 못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게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
엄마는 동생이 입고 간 얇은 점퍼와 동생의 친구가 입고 온 두툼한 패딩을 번갈아 보았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얇은 옷을 겹겹이 입는 게 더 따뜻하다 얘기하는 동생의 말이 가슴에 박혀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했다.
"엄마, 걔 원래 그렇게 입어. 옷장에 두꺼운 패딩도 있는데 지가 입고 싶은 거 입고 간 거야."
그 당시 아빠의 잘못된 투자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더더욱 자책했을 것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남동생을 보며 더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내 아들 제대로 된 패딩하나 사 줄 형편도, 정신도 없게 만든 건 당신 탓이라며 아빠에게 원망을 쏟아 냈을 것이고, 말다툼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단지 개인의 옷 입는 취향일 뿐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엄마는 매년 겨울이 되면 남동생의 패딩을 사 온다.
"엄마, 그런 건 좀 잊히고 살아. 우린 사랑받고 자랐다 자부하며 사는데 왜 엄마가 우릴 결핍 있는 애들로 만들어~"
"겨울만 되면 내가 아주 그때가 저절로 생각나는 게..."
엄마는 아직도 캐캐묵은 그날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말에 남동생이 조카를 데리고 집에 놀러 왔다.
할인하길래 싸게 샀다며 사이즈가 맞는지 입어보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남동생은 신발을 벗자마자 엄마가 사 온 패딩을 입어보았다.
"두툼한 거 입으면 둔해져서 불편하다니까~ 불편해서 잘 안 입게 된다니까~ 이제 그만 사. 옷 많아"
남동생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도 입으면 따뜻하잖아."
엄마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는 남동생을 세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아무래도 앞으로 계속 엄마는 남동생의 패딩을 사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