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처럼 취미를 쳐내지 말자.

-취미는 즐겁게, 딱 그렇게만.

by 코알라

서울로 이직한 박대리를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나는 필라테스, 산책, 등산은 이전처럼 늘 꾸준히 하고 있고, '프랑스 자수'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으며, 내년엔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으니 다시 일본어나 배워볼까 한다며 나의 근황과 계획들을 알렸다.


치열한 서울살이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을 그녀의 일상과 대조될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부러워하며 그녀의 볼멘소리가 나오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린 것이다.

과연, 나의 이 선빵이 더욱 부러움을 자아냈을지 먹혀들어 갔을지는 막상 날리고 나니 의아해졌다.



"오~ 과장님, 취미 부자시네요! 멋져요."

회사를 그만둔 지가 언젠데 나는 아직 박대리라 부르고 박대리는 아직 나를 과장님이라 부른다.

하긴 '언니'라 호칭을 고쳐 부르기엔 너무 오랜 세월 그녀에게 나는 '과장님'이었다. 그래서 나도 '과장님'에 상응하는 호칭으로 그녀를 여전히 '박대리'라 부르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생활, 즐겨보자!


취미? 갑자기 박대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취미'란 단어에 꽂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게 취미일까?"


"엥? 취미지 그럼 뭐예요?"


"뭔가 취미는... 너처럼 직장을 다니거나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본업의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힐링,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나는 지금 돈을 안 벌고 있잖아... 그래서 취미라 할 수 있는 건가 싶어서."


'뭐지? 또 이상한데 꽂혀있는 이 여자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그녀의 표정에 황당, 당황, 어이없음이 모두 나타나 있었다.


"아냐 아냐, 가벼운 의문이야 의문, 표정 풀어~"


"돈을 벌고 안 벌고로 취미냐 아니냐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과장님도 참~"


"너의 하루는 본업에 적응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나의 하루는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시간들이 대부분 이거든. 그래서 가끔 이게 지금 나에게 정말 취미생활이 맞나~ 싶어. 새로 시작한 프랑스 자수 숙제를 다해가는 게 빡세다. 빡세."


말 잘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나인데,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어서 그런지 구구절절했고 두서없으며, 초점도 없었다.


"뭘 그렇게 똥줄 빠지게 하려고 해요. 과장님도 가만 보면 미련하다니까...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숙제 좀 덜 하면 어때요? 여유롭고 자유로울려고 회사 그만둬놓고 왜 또 얽매이고 있어요."


어린놈한테 배우는 게 많다. 영특한 것.




촉박하게 겨우겨우 완성했다 말하며 과제물을 꺼내보이는 나에게, 자수 선생님이 똑같은 숙제를 받아간 다른 수강생들은 힘들지 않게 숙제를 해온다며 살짝 의아해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수놓은 꽃잎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씩 풀어헤쳐 다시 한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이제야 이해되었다는 듯 아직은 기초단계이니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 못생긴 꽃잎이 되어도 괜찮다며, 지금은 기법만 손에 익히는 걸로 충분하다 하셨다.


나의 시간을 내어 시작하는 일, 게다가 돈까지 지불되어야 하는 일에는 반드시 그 값어치만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기간 내 목표를 달성해야 하거나 수준의 향상이 필요한 일에는 일부러 돈을 들이곤 했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무료 수강'은 작심삼일처럼 이내 '무료하게' 대하게 된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긴 하다.

들인 돈을 생각하며 용쓰다 결국엔 즐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린 적이 허다하다.

6개월 치 헬스를 끊어놓고 1개월 바짝 가곤 다신 그 헬스장을 지나가지도 않게 된다거나, 수업이 끝난 뒤에도 온종일 카드 공부만 하다 혼다 지쳐버려 7주 과정의 타로카드 수업을 3주밖에 출석하지 않는다거나... 시간만 있다면 주구장창 나열할 수 있는 목표달성을 이루지 못한 수 가지의 취미 생활들이 있다.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으니 일처럼 하게 된다. 즐기며 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

이 자세를 계속하고 있으면 고관절이 뻐근해지며 아플 거라는 필라테스 선생님의 말과는 달리, 잘못된 자세 때문인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고관절을 아프게 하기 위해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듯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나름 이리저리 하루 루틴과 숙제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보고 있다. 여간 쉽지는 않다.


이게 즐거움인가? 싶다가도 옹졸하게 본전을 생각하게 된다.

'이왕 하는 거, 이왕 시작한 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나의 모든 행위에 존재하는 '이왕'을 떨쳐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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