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슬램덩크'를 두 번 보러 간다.
'장화 신은 고양이'를 예매하려고 들어간 영화관 앱에서 우연히 곧 개봉 예정인 '슬램덩크'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오? 슬램덩크나 볼까...?'
슬램덩크 만화책을 보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저녁 6시쯤 TV에서 방영되던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은 꼬박꼬박 챙겨봤었다. 당시엔 키 크고 잘생긴 주인공 오빠들이 땀 흘리며 농구장을 뛰어다니는 것을 쫓느라 바쁘고, 그저 강백호의 사랑을 독차지한 소연이가 미울 뿐이었다.
애니메이션의 내용보다 더 또렷이 기억에 남은 것은 박상민 아저씨의 슬램덩크 OST '너에게 가는 길'이었다. 전주만 들어도 155cm의 내가 슬램덩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과 열정을 불타오르게 해 주었던 이 노래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동료들의 흥을 돋우는데 아주 탁월한 나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관객이 많지 않은 평일 금요일 오후 시간으로 예매를 하고 J 씨에게 자랑을 했더니, 자기는 굳이 이 나이 먹어서! 영화관까지 가서! 슬램덩크를 보고 싶진 않다며 나를 오타쿠라 놀려댔다.
-으휴, 오타쿠 같으니라고. 너 빼고 죄다 남자들 뿐일 거다.
슬램덩크엔 별 관심 없다 해놓고 왜 빈정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보고 싶음 보는 거다. 나이와 성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뇨.
그리고 오타쿠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렇게 말하는 그대! 남의 이목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에 미쳐본 적이 있기나 한 것인가!
12시 20분, 여유 부리다 영화 시작 시간 1분을 남겨두고 겨우 영화관에 들어왔다.
꽉 차지 않은 듬성듬성 자리 잡고 앉아있는 대부분은 예상대로 남자였다. 연령대는 대학생부터 나만큼의 나이로 보이는 중년들로 다양했다.
J 씨의 바람과는 달리 여자 관객도 꽤 있었고 그중엔 나처럼 혼자 온 여자 관객도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려 영화관의 불이 완전히 꺼지자 소소하게 들리던 말소리들이 사라지고 자세를 고쳐 앉는 듯한 사각거리는 옷소리가 들려왔다.
첫 시작부터 내 입에선 '와 씨, 대박'이 연거푸 나왔다.
왜 이 오래된 만화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왜 이 오래된 만화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지 이해되었다.
주인공만 좋아하는 '주인공 병'이 있는 나는 그동안 슬램덩크의 최애 캐릭터를 '강백호'라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최애 캐릭터로 '강백호'만 고를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이 다섯 남자가 모두 너무 멋지고 좋다. 이제 나에게 슬램덩크의 최애 캐릭터를 묻지 말아 주기를...
'헤어질 결심'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J 씨에게 같이 '헤어질 결심' 보러 가자고 한 것이다. 기승전결을 다 알고 있는 영화를 한번 더 관람한다는 것은 쉽게 싫증을 느끼는 나에겐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다 알고 있어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였고, 무엇보다 영화의 감동을 J 씨와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었다.
높은 산 위에 올라온 듯 정신이 멍하고 흐름이 멈춘 듯 묵직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공기,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 가라앉지 않는 여운, 이 모든 것이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온 순간과 동일했다.
-슬램덩크. 나 또 볼 수 있어. 이번 주에 보러 갈래?
-흐음... 글쎄... 굳이? 나 슬램덩크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네가 또 보고 싶다면 그러던가.
그가 이렇게 답변 이유는 두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삐졌다.
J 씨는 애니메이션을 나만큼 좋아하고, 만화책을 즐겨본다.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도 서로 만화책을 추천하고, 최애 만화책을 서로에게 빌려주면서였다. 그런 그를 놔두고 나 혼자 '슬램덩크'를 보러 갔다는 것에 살짝 삐져서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다.
두 번째, 그는 지금 내가 꼴 뵈기 싫은 것이다.
우리는 이상하게 감정이 반비례한다. 내가 들떠서 설레발을 치고 있으면 그는 그런 나를 꼴 뵈기 싫어하고, 그가 들떠서 뒤뚱거리며 행복해하면 그런 그를 나 또한 꼴 뵈기 싫어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신나 하면 기분을 다운시키고 싶어진다. 내가 지금 신난 것이 그는 꼴 보기 싫은 것이다.
잘 맞는 듯 맞지 않은 우리다.
-보고 싶지 않음 보지 마라. 네 손해지 내 손해냐! 얼마나 재밌는데!
그렇게 지난주 슬램덩크를 보러 가냐 마냐로 한참 밀당하다 보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더 이상 슬램덩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합의하며, 이 주제에 대해선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개봉한 '슬램덩크'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아바타 다음으로 예매순위 2위가 되어있었고, 곧 50만이 눈앞이라는 기사도 보았다.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작가님도 슬램덩크를 보고 왔는지 관련 그림을 인스타에 올려놨다.
마침 퇴근하고 온 J 씨에게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이것 봐,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이 작가님도 슬램덩크 보고 왔나 봐. 다들 난리네 난리."
"... 안 그래도 다들 슬램덩크 재밌다고 난리더라?"
별로 보고 싶지 않다며 받아칠 때의 패기는 사라진 듯한 한 껏 풀이 꺾인 목소리였다.
지금인가?
"이번 주에 보러 갈래?"
"....... 그래, 나도 보고 싶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이번 주 주말, 우리는 슬램덩크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영화를 보며 초롱초롱 해 질 그의 눈동자와 가시지 않는 여운으로 집으로 오는 내내 슬램덩크를 흉내 내며 쉬지 않고 떠들어 댈 그를 생각하니 내가 더 신이 난다.
사실은 한 껏 신난 그에게 '안 본다며? 안 본댔잖아!'라며 놀려댈 생각에 기분이 더 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