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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Feb 10. 2023

컵 하나 크기의 작별 의례

일 년의 출근, 계약 종료

계약은 2월 말 까지, 출근은 어제가 마지막. 신학기 준비로 바쁜 2월 학교 속 스페이스 바로 띄운 빈칸 한 칸이 내가 남은 자리. 담당했던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을 학생들에게 확인시키고, 새 학기에 내 업무를 이어갈 분께 넘겨드릴 서류 파일을 정리하고, 책상을 정리했다. 교무실에 내가 가지고 온 물건은 머그 컵 하나와 마우스 패드와 아이폰 충전기뿐이었다.


뜨거운 물이 담기면 절대반지가 떠오른다..!


책 한 권 사진 한 장 두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고 희망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학생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희망하지 않았기에 이 일을 통한 자기 발전이니 자아실현 같은 거창한 의미부여에 힘 빼지 않았다.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 하나만 두었다. 한 컵 분량의.


11년 전 임용 최종 발표를 앞두고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은지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그걸 쓰던 감정만이 생생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고시원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빛나는 미래를 기대했고 행운을 희망했다. 내가 이렇게 의미 있고 중요한 사람이며 교사를 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나를 꼭 합격시켜 주셔야만 한다는 협박에 가까운 절박감.


기대하고 희망했던 것으로부터 외면받는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기대 없이 희망 없이 현재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복잡한 문양의 형이상학적 고뇌를 걷어내고 컵 한 잔 분량의 역할만 받아 남김없이 마시기. 빈 잔을 깨끗이 닦아 가방에 챙긴다. 노트북을 반납하고 책상을 닦는다.


마지막 퇴근을 기념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 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2월 개학 한 주 동안 가방에 가지고 다닌 책 제목은 작별, 무엇으로부터? 한 권의 책이라는 완결성으로부터, 고정된 문법으로부터, 내용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의 작별.


떠나는 일에 익숙하다 떠벌리고 다녔으나 감정만큼은 매번 새롭다. 내가 떠난 이후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내게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들. 빈자리를 잠시 채웠다 가는 자는 빠르게 잊힌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떠난다는 동사가 떠밀린다는 단어로 들렸다. 이 학교 저 자리 보부상처럼 나의 노동력을 한바탕 풀어놓고 떠나는 삶을 선택한 건 나인데 감정은 쓸데없이 폼을 잡는다.


네가 떠난다는 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네 존재의 무게가 겨우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슬프지 않아? 슬프다고 해, 우울하다고 해, 어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기에 챙긴 책의 제목을 슬쩍 빌리기로 한다. 불필요한 포즈에 심취한 감정에게 작별이라는 단어를 던져 준다.


나는 작별하는 중인 거다, 최선을 다 했던 일 년으로부터.


일몰이 아름답듯 작별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성당의 분위기를 보존하는 경건한 카페 안에서 과일 향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스스로 집전하는 조촐한 작별 의례.


작별이란 삶의 의례,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의 나와 쉴 새 없이 작별하는 중이고, 이토록 필연적인 작별을 슬퍼하기보다 기념하는 편이 건강하다고 쓰면서, 11년 전 고시원 책상에 엎드려 우는 나와 작별하고, 몇 년 전 강사로 일했던 곳을 떠나며 이런 대접받으며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다는 분노와 작별하고, 도대체 나는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는 답 없는 질문과 작별하며, 한 달 늦게 2022년과 작별한다.


대단한 의미는 없으나 한 잔 분량의 이 글로 마무리하는 작별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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