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2년이 흘렀습니다
[존재와 시간]은 굳게 닫힌 채 2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존재도 시간도 모든 것은 변한다. 일하면서 일 년, 일하지 않으면서 일 년, 글쓰기와 육아는 2년 채워서, 출간은 빵, 육아는 지지부진, 존재도 시간도 좋은 쪽으로 변하지만은 않는다.
올해 상반기는 유독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각종 창작 지원 사업은 탈락하고 면접은 떨어지고 공모전은 침묵으로 답장했다. 일 년 넘게 언어치료를 받고 있는 만 4세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나라는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인간 존재로 확장된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존재의 본질은 덧없음이다.
[존재와 시간]이 책상 앞에서 침묵하는 동안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주저 [의미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소품집]을 읽었다. ‘모든 개인, 인간의 모든 얼굴과 그 인생행로는 자연의 무한한 영, 즉 삶에의 불변하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자연의 영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무한한 백지에 재미로 그려 보는 덧없는 형상에 불과하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38쪽, 을유문화사)같은 문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삶의 무의미, 존재의 덧없음 같은 개념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노력하고 추구하고 영위하는 이 모든 삶이 무의미하다면, 나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의 고통을 견딜 만큼 이 삶이 가치 있지 않다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존재와 시간]은 2년 동안 책상 위에 표지를 드러낸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투박한 표지에 주황색 바탕체로 적힌 제목 ‘존재와 시간’은 철학책이라면 응당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어떤 상식을 고수하고 있다. 독일어로 ‘SEIN’과 ‘ZEIT’는 독일어 까막눈으로 보기에 비슷하다. 한글로도 ‘존재’라는 단어와 ‘시간’이라는 글자는 각자 지닌 무게감을 잘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존재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존재 두 글자에 전부 들어가는 ‘자’자는 튼튼한 지붕을 그려내면서 ‘존재’라는 단어 자체로 거대한 집을 지어 낸다. 그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떤 몰상식한 늑대가 쳐들어와도 벽돌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굳건함을 가진 집이다. 나는 존재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존재하는 동안 쌓인 피로를 존재 안에서 푼다.
영원히 존재 안에 고여 있고 싶은 나를 재촉하는 건 시간이다. 서늘한 칼날처럼 끝이 날카로운 ‘사’자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만 쉬고 나와, 존재할 시간이야. 시간의 무심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은 고통 받는 내게 관심이 없다. 시간에게 마음이란 게 있다면 거듭된 실패 앞에서 좌절한 나를 슬쩍 놓아두고 나를 제외한 다른 시간이 흘러가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시간은 냉정하고 쓰러진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존재의 무의미로 고통 받는 동안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내 존재가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모든 시도가 거듭 실패하고 이제는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행위다.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일상적인 모든 행동이 핵심이다.
존재는 의미가 아닌 움직임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쓰기, 누구도 펴 보지 않을 철학책을 읽기, 응답 없는 안녕을 반복하기, 같이 웃기, 과일 가게에서 잘 익은 자두를 골라 사 오기, 강물의 주름을 관찰하러 자전거를 타고 한강 가기, 6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을 가방에 넣고 아이와 공원을 산책하기, 한 번씩 툭 터져 나오는 단어에 기뻐하기, 운동으로 스쿼트 백 개 하고 힘들어 하기, 힘든 걸 알면서도 하는 마음에 대한 글을 쓰기, 2년 만에 [존재와 시간] 다시 읽기.
20240705 집, 표지만 물끄러미 들여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