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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Feb 24. 2022

나는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존재

오랜만에, 존재와 시간의 시간

분석의 과제로 주어진 존재자는 각기 우리들 자신이다. 이러한 존재자와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66쪽, 제1부-1장-9절 첫 문장


몇 번의 수요일이 존재 없는 시간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존재와 시간 사이에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나의 이름이 자주 호명되고 내 존재를 증명할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내가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경력 이후로 2년 만에! 서류 심사에서 2년의 공백을 짚어낸 그들은 나를 뽑았다. 6개월의 단기 일자리지만 충분히 놀라웠다.


오랜만이야


출산 이후 2년 동안 나는 취업 시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19년 이후의 시간이 사라진 이력서에 기록되지 않은 시간에 대해 증명해야 했다. 자기소개서를 다시 쓰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분석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왜 이곳에 지원했는지, 무엇을 잘하고 미흡한 점은 어떻게 보완할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어려웠고 이 증명에 납득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에, 이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수 있고 획득할 수 있다. - 같은 책, 67쪽


나는 선택해야 했다. 출산 이후 2년이 지났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무탈히 적응했고, 내가 기대했던 투고와 공모전 결과들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나의 글과 함께 나의 현실을 지켜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해, 절반은 나의 현실의 몫, 나머지 절반은 내 꿈의 몫으로 직접 구해 와야만 해. 나의 존재를 지켜내야 하니까.


학교 기간제 교사 공고문을 확인하고 원서를 넣으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는 아직까지 존재가 다른 존재를 낳고 양육하는 선택의 가치를 온전히 존중하지 않는다. 육아의 시간은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력서에 쓸 수 없는 나의 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내 선택에 함부로 말을 얹는 자들을 조용히 경멸할 뿐이다.


예상 밖으로 처음 원서를 넣은 곳에서 면접 연락이 왔고 2년의 시간에 순순히 납득하고 다음 날 합격 소식을 알려주었다. 반년의 시간 동안 내 존재를 교사로 옮기는 것에 승낙했다.


합격 이후 매일 머릿속으로 출근을 한다. 2년 만에 수업이라니...그것도 비대면 줌 수업이라니.....전자칠판을 써야 한다니...태블릿 PC도 받다니....업무는 뭘 하려나.....상상 속 나의 현존재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능숙하게 수업을 하거나,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라 모두의 비난을 받는다. 머릿속이 시끄러워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 그것도 철학책인데, 하이데거인데, 이 독서는 나의 '일'에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돈을 버는 건 나의 일, 글을 쓰는 건 나의 꿈.



같은 문장만 다섯 번 넘게 반복해서 읽는데 내가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것 같다. 외국어를 번역한 책이긴 하지, 한 차례 번역 과정을 거치면서 소실된 의미의 부스러기들이 책 여백에 얼룩을 만든다. 손님으로 가득한 이 카페 안은 온갖 말소리가 뭉쳐 비 의미화된 언어들이 구름처럼 떠 있다. 다들 각자의 이야기로 자기 자신의 현존재를 확인한다. 아니, '현존재'는 그의 무엇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표현이지.


'현존재'라는 칭호는-책상, 집, 나무와 같이-그의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67쪽)


내 옆자리의 붉은 스웨터를 입은 사람의 존재는 스웨터만으로 압축될 수 없다. 소설을 쓸 때 나는 가능한 모든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인다. '붉은 스웨터는'이라 호명되는 순간의 납작함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와 시간을 읽는 사람'이라 불린다면 왠지 딱딱하고 지루하며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생각에 몰두하는...얼추 맞는 말인데.....눈물이 난다.....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 잘 알려진 것이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며 잘 안 알려진 것이고 그것의 존재론적인 의미가 끊임없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내 자신에게 나만큼 가까운 것이 있을까?"라고 물으며 "나는 분명히 여기에서 일하고 있으며 내 자신 안에서 일하고 있다. 나에게 내 자신은 많은 어려움의 밭이며, 나는 땀을 흘려 그것을 갈고 있다."고 대답할 때, 이것은 단지 현존재의 존재적 및 존재론적 불투명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 같은 책, 69쪽


이 부분은 눈에 들어온다.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이 나 자신이고, 그래서 나는 나를 모른다. 배율을 지나치게 키운 카메라에 비친 주름이 스웨터의 것인지 피부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나와 너무 가까워 나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내가 숨을 쉬고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이 모든 행위에 선행하는 나라는 존재의 존재가 경악스럽다. 경악하기까지의 '나'는 수많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읽는다. 다시 읽는다. 세 번 읽는다. 시간이 쌓이면서 내가 된다.



20220223 수요일, 커피앤시가렛, 1부 1편 1장 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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