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치였다.
출근 3일 만에 차에 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에 치였다.
앞으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갑자기 차에 치이더라도 함부로 웃지 않기로 다짐한다.
불운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덮친다는 말을 경험에 근거한 교훈으로 삼는다.
생전 처음으로 차에 치인 경험을 묘사하자면, 벽이 움직여 나를 밀친 느낌이었다. 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벽은 제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보호한다. 그런 벽이 의무를 저버리고 나를 배신했다. 몸 왼쪽에서 크고 단단한 무엇인가가 나를 쓰러뜨렸고 땅에 쓰러지면서 방금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대사로 바꿔 쓴다면 '어, 이게 아닌데?' 깨달음이 당도하기도 전에 대사를 내뱉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바닥을 짚고 있었다.
나를 친 차는 경차였고 급하게 멈춰 선 것으로 보아 브레이크를 밟은 듯 했다. 그래서 넘어지는 정도에 그쳤다. 차가 크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저 멀리 날아갔을 것이고 이 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참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에 과몰입한 상태였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죽지 않는 우상을 찾아 헤맨다는 깨달음을 소설화하기 위해 몇 년을 애써 왔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는 문장을 세계 최초로 깨달은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며 썼다. 낮에 그 문장을 쓰고 밤에 그 문장을 붙들고 울었다. 내 소설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았고 아무리 긴 문장을 써도 출판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으니까, 문장은 눈물이 되어 내 피를 묽게 만들었다.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일 년 반 만에 일자리를 구하고 눈물이 말랐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약간의 이용가치는 있는 사람이니까, 확신은 출근 3일 만에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아이 문제가 벽에 부딪혔다. 한 발만 더 잘못 디디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체념 속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맞구나, 그럼 나는 왜 살아야 하지? 퇴근길에 아이를 데리러 걸어가며 나는 나 자신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이다. 나는 내가 너무 가여워, 무거운 두 발이 횡단보도에 올라섰고 그 순간 신은 묵직한 손가락을 들어올려 내 왼쪽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야, 정신차려.
지금 나는 살아 있다. 살아서 출근하고 살아서 물리치료를 받고 살아서 아이에게 줄 미역국을 끓이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놀라서 뭉친 근육과 관절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아이는 울고 울다가 웃고 지독했던 더위는 기세가 꺾여 잠깐 새파란 하늘을 보여준 뒤 폭염주의보가 발동된 추석으로 되갚는다. 눈물이 아닌 땀을 닦으며 나는 새로운 문장을 쓴다.
함부로 스스로를 연민하지 말 것.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소리 높여 호소하지 말 것.
누구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알아 달라 징징대지 말 것.
신은 대체로 내게 관심이 없고 신의 손끝이 내게 닿았다 느낀 그 사고조차 비대한 자아의 착각일 뿐. 자아연민의 문제는 세계의 중심에 나를 놓고 싶어하는 자만의 욕망이고 이 욕망은 에리식톤의 저주와 같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허기와 같아 끝내 나 자신마저 잡아먹어 버린다. 움직이는 벽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눈물이 굳어 자라난 벽은 나를 가두고 나를 잡아먹는다. 내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멈춘다. 세계는 내게 무심하고 불운은 우연이고 나는 여섯시간 뒤 출근해야 할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닌 가끔 불운하고 불운에 한숨 쉬다 액땜 했다 여기며 웃을 줄 아는 보통의 인간이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시간에 초콜릿이나 먹을 일이다. 눈물은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