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겨울방학을 위한 오늘의 수행과제 W-E-B-R
*와드w.o.d : Workout of the day의 줄임말로 크로스핏에서 오늘의 운동 과제를 일컫는 말. 크로스핏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삶이란 와드와 같고 한 번 시작한 와드는 반드시 완료해야 한다.’(크로스핏 독서 수업) 뉴스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나날이지만, 뉴스를 보지 않아도 다 때려치우고픈 비관적인 감정에 자주 휩싸이는 연초, 시간은 흐르고 일상은 이어진다. 한 번 살아내기 시작한 내 시간에 나는 책임감을 가지고 보내야 한다.
- Writing : 2월 말 장편소설 공모전에 응모할 작품 초고를 쓴다. 매일 아침마다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향한다. 집에서는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집 자체가 거대한 과제로 변모하기에 가능한 거리를 둔다.
최소 200자 원고지 500매 이상을 써야 하고 현재 300매를 넘겼다. 이야기는 하이라이트를 향해 질주하고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주인공이 내게 먼저 속삭인다. 나는 이런 선택을 작중에서 할 거라고, 너는 잘 따라오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할 것을 당부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에서 작가는 자신이 쓸 소설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걸 발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이 소설은 결말까지 이미 완성되어 있고 나는 그걸 받아 적을 뿐이다.
지금 쓰는 소설은 사실 작년에 600매 정도 분량으로 결말까지 썼던 작품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불만을 표출했다. 이거 아니라고, 나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고, 한 번 쓴 소설은 끝까지 써야 한다고, 오늘의 작업량은 20매. 결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Exercise : 오늘의 작업량을 채운 뒤 운동복을 챙겨 박스로 간다. 방학이라 오후 시간이 여유로워 정규 수업 시간이 아닌 2시 오픈짐 시간에 박스를 방문한다. 크로스핏 코치님들의 훈련 프로그램(메이햄 등)에 깍두기로 껴서 같이 오늘의 와드와 역도, 중량 훈련, 기타 보조운동까지 같이 하는 시간이다.
오늘 와드는 7분에 1라운드씩 총 5세트를 하는 것이고, 로잉rowing과 월볼샷wall ball shot과 토투바toes to bar를 수행한다. 1라운드가 4분 좀 넘게 걸린 뒤 다음 라운드 시작 전까지 숨을 쉬는데 목에서 피맛이 난다. 35분 뒤 심장은 뛰다 못해 덜그럭대며 나를 향해 화를 낸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나(심장)한테 너무한 운동 아니냐!
심장의 불만사항을 접수할 틈도 없이 파워 클린power clean훈련(115파운드까지), 데드리프트 EMOM(Every Minute on the Minute, 매 분마다 정해진 동작 수행), 백 스쿼트 훈련(195파운드까지), 보조운동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체감상 3일 치 운동을 한 번에 몰아서 한 느낌이다. 특히 오늘 처음 해본 햄스트링 훈련은 할 때마다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넌 이제까지 나(햄스트링)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윽박지르는 햄스트링의 목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모든 운동이 다 끝나고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머슬업 연습은 언제 하지?
-Baby :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뒤 아이는 곧장 냉장고로 달려가 문을 두드린다. 요즘 아이는 부쩍 식욕이 늘고 엄마 아빠가 먹는 음식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저번엔 고기에 찍어먹는 쌈장에 지속적인 관심을 표출하여 보다 못해 젓가락 끝에 쌈장을 살짝 찍어 맛을 보게 했다. 아이는 씁 입맛을 다시고는 몹시 매워하며 물에 주스에 우유에 한참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는 다시 젓가락을 내밀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아이의 관심은 긍정적인 신호다.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니까. 아들과 눈을 맞추고 함께 웃는 시간이 아주 많이 길어져 요즘 아주 많이 행복하다. 아이는 웃는다. 엄마 아빠를 보고 웃는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를 보고 웃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윗집 형아를 보고 웃는다. 버스 옆자리에 서 있는 아저씨를 올려다보고 웃는다. 누구든 눈만 마주치면 빤히 쳐다보며 눈웃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예뻐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잘 생겨서 참 좋겠다...하지만 진짜 잘 생긴 걸 어쩔 수 없는걸?!
밥 두 그릇에 소고기 구운 걸 한가득 먹고 요거트에 과자까지 먹어치운 아이는 동그란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코를 골며 일찍 잠이 든다.
-Reading : 최근에 25년 새해 첫 책을 완독했다. 새해 첫 책은 무조건 문학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읽는 게 원칙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너무나 좋았기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작품 중 사놓고 아직 읽기 전인 [낮의 집, 밤의 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둔다. 책에서 작가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라며 극찬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SF소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도 마침 집에 있기에 같이 꺼내놓는다. 어제 새해 첫눈이 와서 문득 생각이 나서 읽기 시작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은 뒤 차례로 읽을 계획이다. 올해 독서 목표는 연계 독서다. 읽고 있는 책에서 언급된 책이나,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책이나, 책을 읽다 떠오른 책을 이어서 읽는 다단계형 독서다. 더불어 새 책을 구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을 읽는 책장 파먹기도 올해 중요한 독서 목표다. 이미 집에 있는 책만 착실하게 읽기 위해 책상에 올려놓는 그 찰나에 소전서림의 소전독서단 첫 책으로 선택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이 도착해 버린다. 귀향을 얼마나 거창하게 하시는지 분량이 7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브런치 에세이 연재 중인 실존주의 독서를 위해 작년 다 읽지 못하고 넘어온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책상 한쪽 면을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고, 어제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듣는 주인공이 패티 스미스의 앨범을 꺼내 든 순간 갑자기 오랜만에 패티 스미스의 [M트레인]도 읽고 싶고, 한강 작가님 작품도 전체독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혜순, 몽테뉴, 밀란 쿤데라, 왜 책은 한 번에 한 권씩만 읽을 수밖에 없는가?
한 번에 한 권씩 순서대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와드에서 수행할 동작을 동시에 할 수 없듯이, 로잉과 월볼샷이 나왔다고 로잉을 타면서 동시에 공을 던질 수는 없듯이 한 번에 하나씩 확실하게 끝내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한다.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기로 하자. 슬기로운 겨울방학 와드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