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인 것이 싫어지는 순간

내 몸을 견디는 방법

by JiwooRan

2년 전 가장 뜨거운 영화였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는 일을 오랫동안 미뤄 왔다. 영화 시놉시스를 읽어보기만 해도 이 영화가 완벽하게 내 취향이며, 반드시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낼 것이라는 예감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었고 몇 번의 재개봉을 거쳐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나는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그 영화를 보았고, 정확히 내가 예측한 장면에서 눈물샘이 폭발했다.


다만 이 글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울게 된 이유가 주제는 아니다.


영화에 대한 글은 따로 또 길게…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주인공 에블린이 수많은 평행우주 속 에블린'들'로부터 특출난 능력을 연결받아 활약하는 장면을 보면서 상상했다. 내가 갈 수도 있었던 그 모든 평행우주 속 모든 애란'들' 중에, 크로스핏에 특출난 성과를 이룩한 내가 한 명은 있지 않을까? 그런 나에게서 고도로 연마된 크로스핏 기술을 지금 이 우주의 이 몸에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면! 우스꽝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박스 안을 구석구석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몸을 가질 수만 있다면!


왜 나는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십 년간 한 종류의 운동을 꾸준히 해 왔다. 중간에 임신과 출산을 겪고,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밖에 나오지 못하고, 기타 다양한 이유와 변명으로 멀어지는 순간이 있었지만 크로스핏과 나 사이에 놓인 가느다란 선 하나를 끊어내지 않고 유지해 온 시간이었다.


크로스핏이 내게 준 기쁨과 즐거움과 가치관에 대해 먼저 글로 썼다. 기쁨과 슬픔은 쌍둥이다. 둘은 항상 붙어 다닌다. 크로스핏은 내가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그건 한 끗 차이로 내가 내 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무자비함이 될 수 있다. 내 팔다리는 왜 이렇게 짧아서 남들보다 더 오래 달려야 하고 로잉을 더 많이 땡겨야 하는 걸까? 내 몸은 왜 이렇게 둔해서 철봉 위로 가뿐하게 올라가지 못하는 걸까? 내 심장은 자주 지치고, 내 폐는 산소부족을 빈번하게 호소하며, 내 몸은 제발 한 번만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떼를 부린다.


꿈속 평행우주에서 나는 가볍게 기구 위로 날아오르고 몸무게 몇 배의 무게를 들어올리고 그 누구보다 오래 달리고 더 멀리 나아간다.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내 몸에 묶여 있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에 갇힌 내가 분통을 터뜨린다. 겨우 이것밖에 해내지 못하는 비루한 나의 몸, 짧뚱하고 못나 보이는 내 육신, 왜 나는 이런 몸으로 태어났는지 원망하고 슬퍼하는 데 삶의 절반 이상을 썼다.


이 글은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주제를 담고 있지 않다.


이 우주에 이 몸으로 태어난 이상,


크로스핏은 인간의 몸이 체험하는 고통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전달한다. 육체가 중력에 묶여 있음을, 근육이 찢어지고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확실하게 형상화한다. 개인적으로는 밀어내는 동작(스쿼트, 핸드스탠드 푸시 업, 프레스 동작들) 보다 당기는 동작(데드, 풀업 등)에서 몸의 고통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 끌어당기는 행동을 어색해하는 내 몸은 모든 우주의 모든 나를 안아주기보다 왜 하필 이 우주의 이런 나로 태어났는지 미워하며 밀어내는데 익숙하다.


내가 나인 것이 싫어지는 순간이 있다. 10년 전 크로스핏을 하기 전과 비교하면 드물어지긴 했지만, 가끔씩 내가 나를 괴롭히는 순간이 나를 때린다. 완벽한 내가 되고 싶고 이상적인 나를 꿈꾸며 현재의 나를 증오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이미 알고 있다. 앞으로 나는 모든 크로스핏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놀라운 무게를 들어올리며 오픈에서 전 세계 상위권의 등수를 결코 이룩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날 안 되던 동작에 불현듯 성공하고, PR 무게가 눈곱만큼 오르고, 조금 더 건강하고 튼튼한 몸으로 단련하는 것 정도가 내 몸의 최대 성과일 것이다. 내 몸이 싫어도 나는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견디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나인 것을 견딜 수 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편안하게, 약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어도 내가 나인 걸 받아들일 수 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차분하고 덤덤한 마음으로. 인력과 척력 사이 중성 부력으로 유유히 유영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서 몸을 움직인다. 몸을 견디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래가지 않고 '나를 사랑하자!'는 외침은 속이 비어 있다. 핵심은 견디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가능한 흥겹고 흥미롭게 나를 견디는 방법을 익히는 것, 나는 그게 크로스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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