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과 함께 살아가기
반려 : 짝이 되는 동무
십 년째 함께하는 나의 반려 운동은 내가 심심해 보이거나 지루함을 느끼는 둣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새로운 과제를 던져 준다. 최근에 철봉에 매달려 발끝으로 바를 터치하는 토 투 바toes to bar 동작과 풀업(턱걸이)에 익숙해졌다 싶으니 이 둘을 이어서 해 보면 재미있을 거라고 부추겼다. 네가 어렸을 때 그렇게나 치를 떨었던 줄넘기도 이제 곧잘 하니 엑스자 넘기cross over도 잘하겠지? 너랑 나랑 십 년 됐으면 역도 무게는 세 자릿수(파운드 기준..)는 찍을 때가 됐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내게 말한다.
크로스핏을 그토록 오래 했는데도 새로운 운동 동작이 등장하고 기존 동작의 참신한 조합이 소개되면 연습하느라 매번 애를 먹는다. 와드에서 요구되는 무게는 높아져만 가고 훈련은 끝이 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내가 나와 싸우는 기록 운동이지만 타인과의 기록 비교를 안 할 수 없고 해가 갈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내 몸이 내 의지를 따라가기 벅차하는 걸 느낄 때마다 속상하다. 새 동작이 잘 안 되고 내가 수행할 수 있는 무게가 더디게 오르면 반려를 반려(윗사람이나 상급 기관에 제출한 문서를 처리하지 않고 되돌려줌)시키고 싶지만, 나는 알고 있다. 너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네 곁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내 반려 운동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려-대상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너무 많은 말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우리는 그걸 보통 사랑이라고 부른다.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고, 길을 걷다 갑자기 벅차올라 두 주먹을 쥐고 발을 동동거리며 몸을 주체할 수 없으며,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떠올릴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감정. 나는 그걸 '반려'라는 단어로 정의하겠다.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있어 줄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 나를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
사랑은 타이밍이듯 내 인생의 반려 대상과의 만남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으면 어긋나기 쉽다. 기약 없이 길어지던 임용고시 공부에 지쳐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고 다짐했던 순간, 이를 위해 체력을 기르고 몸을 다듬어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 집 근처에 크로스핏 박스가 있었다. 방문 예약을 한 당일은 비가 정말 많이 왔다. 비를 뚫고 도착한 크로스핏 박스에서 나를 맞아 준 코치는 운동을 가르쳐 주며 스쿼트를 한 번 해 보라고 했고 내 스쿼트를 보더니 한 마디를 했다.
"어? 왜 잘하지?"
삶에서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이 있다. 분당 서현문고 신간 매대 앞에서 요즘 인기작이라고 소개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펼쳐 읽기 시작한 순간, 대학교 앞 칵테일 바에서 한 학번 위 선배에게 손을 내밀며 지금 이 손을 잡아 줄 수 있냐며 질문한 순간, 핸드 스탠드 푸시업handstand push up을 처음 배운 날 바로 한 개 성공한 나를 보고 코치가 한 번 더 "왜 잘하지?"가 나왔던 순간. 나의 평생 직업과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와 역시 평생 하게 될 운동이 결정된 순간들, 그날의 공기와 날씨와 빛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과 말 한마디 조사 하나까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다 기억이 난다. 반려의 대상이 결정된 순간은 우리를 기억의 천재로 만든다.
삶은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써 왔다. 그럼에도 가끔씩 삶의 이유를 캐묻는다. 하루를 온통 그것만 생각하며 보낸 시기도 있었다. 나는 왜 살지? 나는 왜 살아있어야 하지? 태어남에 이유란 없다는 깨달음의 문장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두운 시기였다. 창문도 없는 방 안에 갇혀 출입문을 찾아 벽을 더듬어가는 그 시간을 낭비라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삶에 이유가 없다면 이유를 만들어 버리자, 문이 없다면 온몸을 부딪혀 내 모양의 문을 뚫자.
너무 많은 말이 떠올라 하루 종일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 수 있는 대상이 있다. 누군가 내게 '무슨 운동을 하시나요?'라고 질문해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저 크로스핏 하는데요-와! 그거 힘든 운동이잖아요!-재미있어요.-재미있다구요?-의 떡밥을 물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왜 크로스핏이 재미있는지 9984750138가지의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아 상대의 안광을 없애버릴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철봉에 내 발끝이 닿는 순간의 타격감에 대하여 토론하고, 줄넘기의 성능을 비교하며 이단 뛰기와 엑스 자 뛰기의 기술을 비교 및 대조하고, 환갑을 맞이하여 수행할 수 있는 환갑잔치 와드 종목으로 무엇이 적절할지 상상해 보고, 내 반려 운동은 내가 살면서 심심하거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애초에 길게 떠들 수 있는 반려 직업과, 반려자와, 반려 운동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살 만해 지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