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꿈이 실현된 날

패티 스미스를 만나게 된 순간

by JiwooRan

어떤 책은 내게 너무나 크고 강력한 영향력을 끼쳐, 책과 내가 분리 불가능한 경지에 다다른다. 지금까지 읽어온 독서 목록에서 꺼낼 책은 딱 두 권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과 패티 스미스의 [M 트레인]. 이 책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이 두 권의 책과 기약 없는 사랑에 빠져 버렸다. 사랑에 빠진 시기도 비슷하다. 2014년에 [불안의 책]과 처음 만나 일 년 내내 떨어질 수 없었다. 그 다음 해 [M 트레인]을 만났고 그 뒤로 두 권의 책이 없는 내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강력한 마력을 지닌 책의 영향력 아래 그 책을 쓴 저자를 먼 발치에서라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꿈을 품는 건 애서가의 필연적인 욕망이리라. 1888년 생의 포르투갈 작가를 만나기 위해 다소 위험한 방법을 써야겠지만, 평범한 독자인 나는 분신사바 대신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생전에 그가 살았던 집을 방문하고 그가 걸었던 리스본의 거리를 걷는 것으로 만족했다. 1946년 생 미국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예술가인 패티 스미스는 나와 같은 세계 안에 존재한다. 활발하게 인스타그램을 하고, 꾸준히 글을 쓰고, 지속적으로 공연과 작품 활동을 하며 살아 계신다.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M 트레인]에서 내가 배운 결정적인 삶의 태도 중 하나가 꿈을 꾸며 살아가는 방식의 아름다움이다. 언젠가 해외 어느 나라에서 여행 중에, 마찬가지로 여행 중이던 패티 스미스를 우연히 스치듯 마주치는 순간을, 마침 그 순간에 내 손엔 [M 트레인]이 들려 있고, 책 표지를 그녀에게 들어 보이며 당신이라고 말하는 나와, 그걸 본 패티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장면을, 나는 상상했다. 소설가라는 직업의 장점은 아무리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더라도 '지금 일하는 중이야...'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매 순간 일한다. 잠을 자는 순간조차 열심히 일한다. 꿈을 통해.


꿈은 이룰 수 없기에 아름다운 법이라고 나는 써 왔다. 영영 출간되지 않을 나의 아름다운 소설, 녹음되지 않기에 그 어떤 노래보다 아름다울 나의 자작곡,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기억 속에서 완벽해질 수많은 순간들, 실현되지 않아 온전하게 보전될 나의 꿈들. 세계는 나라는 평범한 인간 1에게 무관심하고, 관심 받길 갈망하는 인간 1은 애써 그 실망감을 달래기 위해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름다운 법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문장을 써 낸다. 꿈을 꾸는 건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권리니까.


이 세계는 대체로 자신이 품은 인간 존재에 무관심하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절대 열리지 않은 문 앞에 포기하고 주저앉은 인간 중 한 명을 지목하여 문 틈으로 빛 한 줄기를 볼 수 있게 허락한다. 4월 18일 금요일 퇴근길에 인스타그램에서 패티 스미스가 사운드워크 콜렉티브와 협업한 전시 <끝나지 않을 대화>가 내일 19일부터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리고 19일에 강연 및 북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그 소식을 19일 당일이나 다음 날이 아닌 전날에 미리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세계의 개입이라고 해석하겠다.



4월 19일 토요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강풍주의보까지 겹쳐 비가 가로로 내렸다. 당장이라도 뒤집어질 위기에 처한 우산을 붙잡고 전시가 열리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피크닉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전시회 도록을 사고, 도록 구매자에게 배부되는 사인회 번호표를 받고, 혹 사인회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안내를 받고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왔다. 내가 받은 번호표는 6번이었고 전시장에서 나오자마자 사인회가 진행되는 장소로 달려가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을 양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그녀는 책에서 나온 대로(인스타그램에서도 자주 본 대로) 일렉트릭 레이디 스튜디오 티셔츠를 입고 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항상 작성하는 여행 목록에 빠지지 않는 옷을 입은 그녀가 한국에, 내 앞에 앉아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 주변은 다른 곳보다 밝다. 흰 머리칼과 머리칼만큼이나 밝은 미소와 그녀만의 아우라가 공간을 조용히 채운다. 내 앞에서 나와 같은 책을 가지고 와 사인을 받은 사람이 감격에 겨워 거의 쓰러질 것 같다.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한다. 그녀가 내 책의 표지를 열고 사인을 한다. 책에서 그녀가 성소로 향하듯 습관처럼 가던 카페 이노가 문을 닫던 날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위에 사인을 한다. 그녀가 책 표지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쓰다듬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수줍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기꺼이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준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다. 이것이 네 꿈의 질감이다, 그녀의 손을 통해 세계가 말을 건다. 가끔은 나도 너의 꿈을 훔쳐볼 때가 있단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움직임을 믿는다. 그 유쾌한 풍선을, 세계를 믿는다. 자정과 정오의 시각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또 무엇을 믿고 있을까? 가끔은 모든 것을. 가끔은 아무것도. 연못을 훑는 빛살처럼 요동친다. 나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각자 잃어버릴 삶을 믿는다. - 패티 스미스 [M 트레인], 마음산책, 290쪽,



[불안의 책]과 [M 트레인]을 통해 내가 받은 것들, 페소아는 죽을 때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트렁크를 가득 채울 미완의 원고를 남겼다. 패티 스미스는 책 서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다'는 메시지를 꿈으로부터 받아 책 한 권을 썼다. 내가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해가 2014년이었다. 인간에게 무관심한 세계로부터 글쓰기를 통해 뭔가를 보여 주고 싶다는 결심을,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필요할 때 두 권의 책이 내게 왔다.


오늘부터 나는 꿈을 믿는다. 이룰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꿈의 부드러운 질감을 믿는다. 신을 믿지 않는 자의 신앙을 믿는다. 흔들리는 삶을 붙잡을 수단으로 글쓰기를 믿는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을 나도 믿을 수 없지만, 글을 썼다는 행위 그 자체를 믿는다. 삶이란 글쓰기라는 것을 믿는다. 소설가라는 직업의 좋은 점은 이렇게 삶 전체를 직업으로 바꿔 버리는 천연스러움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