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삶의 연장이라면
아이를 안을 때 주로 엉덩이를 오른팔로 받치고 어깨로 상체를 기대 뒤를 보는 자세를 취한다. 이제 고개를 잘 가누는 아이는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특히 내 어깨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등 뒤를 내 아이는 본다.
출산 3시간 전 당일배송으로 책 택배를 받았다. 연말 교보문고 인문학 MD가 만들었다는 ‘통곡의 리스트’ 인문학 도서 추천 목록을 보고 흥미로워 몇 권을 주문했다. 그날 아침부터 느껴진 진통에 미래를 예감한 나는 택배를 뜯고 그중 한 권을 출산 가방에 집어넣었다. 제목이 끌려 산 진 커제즈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이었다. 그렇게 책을 챙기고, 족발을 먹고, 샤워를 한 뒤 병원으로 향했다.
많이 읽는다는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나 [베이비 위스퍼]같은 정통 육아서가 아닌 철학책을 챙긴 과거의 내 모습에서 아직 쓰여지지 않은 소설의 첫문장이 떠오른다.
‘그녀는 아이를 낳기 직전 육아서가 아닌 철학 도서를 챙겼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실용적인 지식이 아닌 철학적 성찰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과연 철학적인 성찰에 익숙해 잘 울지 않고 홀로 사색에 잠기기 일쑤고....습관적인 소설 창작의 현장.
나는 육아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필요했다. 우는 아이 달래는 법이나 모유수유 잘 하는 방법 등 육아의 실제는 조리원에서 도제식으로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부모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스스로 사유하며 직접 정립할 문제였다.
조리원 침대 위 일 년 만에 배 깔고 누워 읽은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나 사실 기본 주장은 명료하다. 왜 우리는 시험관에 대리모까지 불사하며 내 혈연에 집착하고 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내’ 성공과 실패로 여기는가? 그건 ‘아이는 제 2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ㅡ아이는 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에 내 자아와 유사하다.(진 커제즈,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 27쪽)
우리는 아이를 응시하며 닮은 점을 찾아낸다. 눈코입은 아빠 닮았고, 머리숱은 엄마 닮았고, 아빠처럼 머리 대면 길게 자고, 엄마의 무던한 성품이 서로 비슷한 것 같고, 우리의 일부를 이어받은 아이의 눈매가 내 눈 같고 옹알이하는 입술이 아빠 것이고,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들을 숨은그림찾기 놀이하듯 찾아내며 즐거워한다.
- 61쪽, 부모들은 출산을 통해 '대리 생존'을 획득한다. 이는 사후에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재탄생 방법이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의 생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훨씬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자신의 생명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출산을 통해 먼 미래로 우리 자신의 삶을 연장시킨다.(같은 책)
대를 잇는다는 표현이 생각 이상으로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사실이 나를 치고 지나갔다. 언젠가 내게 죽음이 찾아오고 내가 사라진 미래의 세계를 내 아이가 살아간다는 것. 나는 영원히 살 수 없지만 유전자로 존재하는 나의 일부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리라는 것.
내가 죽어 유령이 되어 내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 적 있었다. 내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떤 빛인지 바라보고, 육개장을 먹으며 나를 주제로 오고 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때 나는 죽음과 선 하나만 사이에 둔 대치 상태였다. 그 선을 넘지 않은 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를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세상 속 이 고독감이 지긋지긋하지만 내가 부재한 세상은 더 끔찍하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고 죽음은 멀리 물러났다.
영화 <맨 프롬 어스>처럼 불멸하는 존재에 대한 상상도 했다. 우주여행이 보편화되고 지구 밖으로 확장된 인류의 발자취를 끊김 없이 오래도록 관조하고 싶다는 욕망. 불가능한 욕망을 구현한 소설과 영화를 찾아보고 직접 소설로 풀어 보았다.
이젠 유령이나 불멸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내 이후의 삶에 존재할 방법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이 있다. 내가 낳은 아이가 있다. 나보다 더 오래 존재할 나의 작품이. 나 대신 내 등 뒤의 세계를 응시하는 제 2의 내가. 내가 보지 못할 미래를 살아갈 나의 아이가.
아이는 내 팔에 작은 두 발을 디디고 서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본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