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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Dec 19. 2020

지극히 사적인 올해의 책 7권

2020년 독서 결산

이 글을 쓰는 12월 18일 기준 2020년 올해 읽은 책은 총 106권,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눕히고, 자는 시간을 쪼개 부지런히 읽었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내부적으로 독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는 전혀 반갑지 않다) 지극히 사적인 올해의 책을 골라 보면서 한 해를 정리한다.


나만의 책 선정 기준은

1. 내 서재에서 10년 이상 절대 빠지지 않을

2. 두 번 이상 재독 삼독 몇 번이고 다시 읽을

3.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같은 책(카프카)들이다.



1.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무지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저 힘을 빼버리니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거겠죠

- <하고 싶은 말 지우면 이런 말들만 남겠죠>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이 시집을 사랑하고 말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한 편 두 편 읽으면서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작지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다정하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속이 다 보인다고 확신한 순간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시인의 목소리는 투명한 바다처럼 바닥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파도가 모든 걸 지워버린다. 무지개처럼 밀리지 않는 힘으로 그려낸 제주는 우리 모두의 제주이자 시인만의 세계다.


2.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 [일곱 해의 마지막] 32쪽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은 덕후의 죽은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스무 살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고 김연수 덕질을 시작한 지도 벌써 14년 차,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후로 산문집을 제외하고 소설로는 7년 만의 신간이었다. 예약 구매를 걸어놓고 기다릴 수가 없어 단골 북카페로 달려가 동네서점 판을 또 샀다. 책을 펼친 즉시 내 의식은 분단 이후 북한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안에서 서서히 시를 버려야 했던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던 그가 불행하지 않길 바랐고, 소설은 최선을 다해 시인을 위로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3. [화이트 호스] 강화길



어쩌면 그녀는 찬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무언가를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쓰는 사람, 그러니까 오직 뭔가를 만드는 사람만이 바꿔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 그런 화이트 호스를.

-<화이트 호스> 217쪽


올해도 좋은 소설을 많이 만났다. 신생아를 안고 벅찬 감정 속에서 읽었던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깔깔 웃으며 읽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가만히 앉아서 읽을 수가 없어 책을 손에 든 채 서성이며 읽은 황정은의 [연년세세]. 그중에서 강화길의 단편집 [화이트 호스]를 꼽은 건 올해 내가 가장 고민했던 지점을 정확히 짚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깨기 전에 서둘러 한두 줄 글을 쓰면서 이게 맞는지,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주 헤맸다. 강화길을 읽으며 소설가가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에 대해 숙고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만의 화이트 호스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4.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 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천장과 바닥> 46쪽


인스타그램으로 그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 그는 내게 <디 워> 관련해서 논쟁했던 영화 평론가, <마녀사냥> 패널로 나오는 촌철살인 연예인 정도의 의미로만 존재했다. 혈액암이 완치된 뒤 출연한 <나 혼자 산다>를 보고 분위기가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왔다. 방송 자체도 재미있었고 그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새 산문집이 나오고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읽다 바로 종이책을 샀다. 존재를 짓누르는 천장으로부터 살아 나온 자의 목소리는 발성부터 달랐다. 우리의 삶은 대체적으로 불행하고, 불행의 원인을 찾아 헤매는 일은 의미가 없고, 그저 묵묵히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삶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 나는 이제 그의 글을 오래 읽을 것이다.


5. [내향 육아] 이연진



어느 학자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기질의 남과 북'이라 칭했다. 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 선택과 행동, 삶의 양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엄마들은 줄곧 '엄마'로만 뭉뚱그려졌다.

- [내향 육아] 65쪽


그래도 제법 잘 해내고 있다는 엄마로서의 확신이 요로감염과 신우염의 폭풍 속에서 다 날아가 버렸다. 퇴원이 계속 미뤄지고 무기력해진 나는 소아병동 보호자 침상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되고자 하는가, 나를 잃지 않고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이가 잠든 병상 옆에 몸을 웅크리고 이 책을 읽었다. 나도 언젠가 이 분처럼 나만의 육아서를 쓸 수 있을까, 미래의 책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힘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퇴원했다.


6.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내기, 맞다. 거짓말하기, 아니다. 창조한다는 건 상상으로 꾸며내기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포착이라는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 [G.H에 따른 수난] 25쪽


작년 국내 처음으로 소개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정말 세상 모든 것이 소설이구나, 리스펙토르야말로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같은 작가다. 배수아 작가 번역으로 읽는 낯선 브라질 작가의 소설은 난해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다. 줄거리 요약이 불가능한, 요약하는 순간 의미를 잃는 소설. 다들 읽었으면 좋겠지만 '뭐 이런 걸 읽으라고?' 내게 화를 낼 것 같은(ㅋㅋ) 소설. 더듬더듬 문장을 따라 읽으며 들어가는 리스펙토르의 세계는 미궁 그 자체다.


7.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사라 베이크웰



당신이 읽은 책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 : 50년대와 60년대 세계로 퍼져나갔던 실존주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현대 철학이 그랬던 것보다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실존주의 관련 서적은 페미니즘, 동성애자 권리, 계급 장벽의 혁파, 반인종주의나 반식민주의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존재론적 기초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이에 영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보다 더 개인적인 형태의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457쪽


이 책은 다른 여섯 권의 책과 달리 올해 출간작은 아니지만(2017년 12월 출간) 10킬로 달리기를 한 뒤 마신 에너지 음료처럼 책의 모든 내용이 내 몸속으로 남김없이 흡수된 걸로 올해의 인문서 자격이 충분하다. 일단 이 책을 읽은 뒤 내년과 내후년 독서 계획이 상당 부분 바뀌었다. 사르트르, 보부아르, 후설, 하이데거, 아이리스 머독, 레비나스, 이름만 들어도 숨 막히는 실존주의와 현상학 저서 읽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MBTI나 사주 같이 내게 맞는 철학 사조를 테스트한다면 나는 실존주의가 나오지 않을까. 교육철학 공부를 하면서 실존철학을 만났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때의 나는 스무 살이었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부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고  '인간은 세계 속에 무작위로 던져진 존재다'같은 문장에 기뻐 날뛰던 어설픔이 있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에피소드를 유려하게 엮으며 '실존주의'라는 소설 한 권을 읽은 것 같은 미친 필력의 작가가 안내하는 이 철학은 이제 현대사회의 기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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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내 취미가 독서여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몰입할 수 있는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암담했던 올해 나를 구원한 건 결국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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