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를 읽고
"알겠나, 자네는 혼자 힘으로 상상해야 돼. 정신 차리고 지혜를 쥐어짜서 떠올려보라고.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그렇게 진지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게 어떤 것인지 보이거든."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노인은 무슨 단단한 것이라도 뱉어내듯이 말했다.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 그러고는 행을 바꾸듯 간결하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 무라카미 하루키 <크림>, [일인칭 단수]
새 책을 잔뜩 샀다. 여행도 운동도 카페 놀이도 대부분의 취미가 막혀 버린 올해 책에 더 집착하게 된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제자리를 찾아가는 책들을 헤아리다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책장 전체를 본다. 내가 만드는 퍼즐의 그림은 무엇인가. 이 책들을 읽고 나는 무엇을 만들려 하는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삶에서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적지 않은 책을 읽고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지, 포괄적인 의미의 작가가 되고 싶은지, 지적 허세를 충족하기 위한 독서인지, 단지 인테리어일 뿐인지, 대화를 하고 싶어 책을 읽는데 책들은 입이 없다.
책장 한 칸 전체를 차지한 하루키를 노려본다.
기묘한 일에 휘말린 주인공 앞에 노인으로 분장한 하루키가 나타나 불쑥 말한다.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릴 수 있나?"
항상 이런 식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게 아는 것을 하루키는 애써 묘사하려 시도한다.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방황하는 인간들. 그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 찾아내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등장인물들. 그들은 단카나 시를 지어 책으로 만들고(<돌베개에><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가상의 재즈 앨범을 상상하고(<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최고의 슈만의 <사육제> 레코트를 찾기 위해 연구한다(<사육제>).
그렇게 애써 만들어진 인생의 크림은 어떤 맛인가.
지금의 '나'는, 일인칭 단수로서 존재하는 나는 어떤 시간과 기억과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일까? 인생의 크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더불어 하루키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짚는다. 그건 <위드 더 비틀스> 레코드를 가슴에 안고 걸어가던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위드 더 비틀스>), 기대하지 않던 사인볼이 무릎 위로 툭 떨어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 우연한 사건이 퇴적된 지층을 이루어 내 발밑에 자리한다. 그러다 지진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드러나는 것이다. 그 파열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 무라카미 하루키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다. 비틀스 앨범을 들고 스쳐간 소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해도, 함께 <사육제>를 논하던 친구가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정체를 드러내도, 세상이 갑자기 낯설게 바뀌어도(<일인칭 단수>)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다. 내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중심이 여러 개인 둘레를 갖지 않은 원'을 애써 상상하려 노력하며 부지런히 휘핑을 쳐 크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내 삶의 당도는 지금 얼마쯤일까, 녹진녹진한 크림으로 잘 부풀어 오르고 있나, 내 손에 묻어나는 크림을 상상하며 오늘의 독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