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필 [공부머리 독서법]과 애서가의 탄생
내가 가진 책이 모두 몇 권이나 될까?
코로나로 집콕하게 된 추석 연휴, 남편과 아이는 잠들고 혼자 서재에서 정현주 작가님의 [그래도, 사랑]을 읽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다정한 글 속에 언급된 영화와 책 중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가 눈에 띄었고 즉각 내 등 뒤의 서가에서 책을 꺼냈다.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선반 가운데가 내려앉은 내 책꽂이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그 수많은 잡동사니로부터 내가 창조하려고 했던 그 전체이다. -
앤 패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가진 잡동사니들이 얼마나 되는지, 이 방에 정확히 몇 권의 책이 머물고 있을까? 결혼과 함께 이고 지고 온 책들을 기반으로 3년 간 열심히 불려 온 서재의 몸무게를 제대로 측정해 본 적은 없다. 과거 엑셀로 장서 목록을 만들어 볼까 시도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두 번 실패했다. 마침 요즘 사용 중인 독서 관리 어플에 바코드만 찍으면 자동으로 책 목록을 만들어 주는 기능이 있었다.
저녁 먹고 9시쯤 시작된 장서 목록 만들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들처럼 책을 꺼내 바코드를 찍고 또 찍고, 바코드만 찍는 일도 수고로웠다. 겉표지가 없어 바코드가 사라졌거나 너무 오래되어 바코드 검색이 안 먹히는 책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목록에 더했다. 한 권 두 권 사 모은 만화책들, 십 년도 더 지나 속지가 노랗게 나이 먹은 책들, 낭독회나 강연회에서 저자에서 사인 받은 책들 하나하나 확인하고 정리했다.
새벽 세 시에 끝난 목록 만들기의 결과는 딱 900. 이 방에 구백 권의 책이 잠들어 있었다.
애서가의 탄생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책은 내게 당연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책장이 떨어져라 읽은 동화 전집, 분당 삼성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바로 옆의 서현 문고에서 그 자리에 서서 한 권을 다 읽어버린 해리 포터, 서점에서 한 권씩 내가 골라 사 모았던 지경문고...부모님은 동화 전집 한 질을 제외하고 다른 전집을 더 들이지 않으셨다. 대신 서점으로 데려가 직접 책을 고르게 했다. 제목과 표지를 보고 재미있어 보이면 몇 페이지를 읽어본 뒤 고른 책을 아빠에게 내밀면 두 말 없이 사 주셨다. 그렇게 나만의 서재가 태어나 자라났다.
최근 우연히 [공부머리 독서법]을 읽고 나서야 아빠의 방법이 독서가를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독서가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책 구경하기'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입니다.(전자책 319쪽)'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으면서 자기만의 독서 이력을 쌓아야 책과 친해지고 읽기 독립을 이룰 수 있다. 동화책이나 판타지 소설만 읽는 아이에게 부모가 공부에 도움될 것 같은 책들을 강요하게 되면 오히려 책과 멀어진다. 책을 읽지 않으면 언어 능력이 떨어지고 언어 능력은 학교 성적에 바로 반영된다.
제목만 보면 '아이 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당장 책을 읽혀라!'같은 양산형 교육법을 강요하는 책 같지만, 내용은 의외로 정석 독서법을 기반으로 '좋은 독서 지도법'을 설명하고 애서가의 탄생을 자세히 묘사한다.
독서 지도할 때 명심해야 할 7가지
1. 재미있는 독서가 좋은 독서다
2. 독서시간을 정해 매일 읽는다
3. 지식도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4.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이나 서점에 간다
5.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늦게 접할수록 좋다
6. 학습만화는 금물이다
7. 천천히, 많이 생각하며 읽을수록 똑똑해진다
- 최승필 [공부머리 독서법]
정확히 이 독서 습관을 기반으로 매일 책을 읽은 결과, 중학생 때까지 평범했던 내 성적은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급상승했다. 숨 쉬듯 소설을 읽었고 매주 서점이나 도서관에 갔다. 책 읽는 게 재미있어 자발적으로 어려운 책도 찾아 읽었다. 우주와 인체에 관심이 많아 과학 전문 서적을 찾아 읽은 내게 교과서는 오히려 읽기 쉬웠다. 읽기 능력이 '공부머리'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아빠는 내게 애서가 유전자를 물려주셨다. 아빠 역시 매일 책을 읽고 꾸준히 책을 사 모으는 애서가다. 안방 한쪽 벽면을 차지한 아빠의 서가를 참고하며 나의 서재를 키웠다. 아빠는 내가 아빠 서재에서 [수호지] 같은, 아이가 읽기엔 다소 선정적인 소설을 읽어도 막지 않았다. 대신 읽을 때 윤리적으로 주의할 점을 짚어 주셨다.
서재는 나의 소우주
이렇게 모인 나의 '잡동사니'들로 나는 무엇을 창조하려 했을까? 절반 이상이 소설에, 관심 가는 대로 이 분야 저 영역 조금씩 사 모은 이 서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의 취향은 어느 정도 확립이 된 상태지만 정확한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기는 아직 어렵다. 소설과 소설을 둘러싼 책들이 모여 뭔가를 쑥덕거리는데 내 서툰 귀는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한동안 아이의 서재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두 배로 복잡했었다. 좋은 아동용 전집을 구해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책육아 카페에 가입해 전집 공구 게시물을 정독하며 초조해했다. [공부머리 독서법]에서 7세 이전의 영유아기 조기 교육은 오히려 아이 뇌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을 읽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건 '하루에 한 번 그림책 읽어주기'다. 전집을 쌓아두고 많이 읽히기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어 주기가 중요하다.
아빠가 했던 대로 아이 스스로 자신만의 서재를 만들 수 있도록 서점과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가서 직접 책을 고르게 할 것. 가끔 내 서재를 흘끔거리면 기꺼이 공개하고 읽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것.
책이 저자가 만든 하나의 세계라면,
서재는 그 세계를 모아 만든 나만의 소우주다.
자신의 우주는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야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