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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an 11. 2021

제가 50번 정도 살아 봤는데요

정세랑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과 소설을 읽는 이유

왜 소설을 읽는가, 가끔 혼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받는다. 재미있으니까,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다 내가 좋아하는 답이다. 나는 열심히 살아도 결국 나일뿐이고,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소설은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보는 것,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잠시나마 살아보는 것.


그런 경험을 소설 한 권으로 50번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경험이었던 독서


이런 소설이 가능하구나, 읽는 내내 감탄했다.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작가의 말)는 예상과 달리 산만하지 않고 흡입력 있게 쭉 읽힌다. 앞의 주인공이 뒤의 주인공과 어떤 관계인지 찾아가며 읽는 맛이 있다. 서울 근교의 개발이 한창인 중소도시의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병원의 의사, 의사의 연인, 연인의 친구, 친구의 부모, 병원의 직원, 직원이 자주 가는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의 부모, 아르바이트생의 친구, 친구의 전 연인... 이런 식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짙거나 연한 선으로 이어진 인물들이 한 명씩 등장한다.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학생부터 의사 및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소설을 읽고 나면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우리 집을 주로 담당하시는 택배 기사님의 낯익은 이름을 보며 그 이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매일 밤마다 어디선가 주기적으로 들리는 울음소리에 실린 사연을 생각하게 된다. 이른 아침 창밖으로 드문드문 불이 들어온 건너편 아파트 창 안의 삶을 그려본다. 타인을 상상하게 되면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택배가 늦어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울음소리에 연민을 느끼고,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게 된다.


다만 타인을 '이해한다'는 행위를 '수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소설 속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들이 존재한다. 둘째를 임신한 아이를 두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여학생의 목을 칼로 그어버린 남자, 기강을 잡겠다고 후배들의 뺨을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의사, 아들의 분노를 방관하다 딸에게 가해진 폭력을 모른 채하는 부모, 비리가 얽혀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다치고 실익만을 추구하는 병원에서 의사들은 고강도의 노동을 버티다 쓰러진다.



소설 안팎으로 이해하기 힘든 인간들이 무수하다. 특히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폭력과 범죄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심장 한쪽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자신보다 어리고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한 인간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도구로 대한 가해자의 사상이 보이지 않는 칼이 되어 찌른다. 이런 인간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을, 그 시스템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해해야 한다. 그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인간들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 정세랑 [피프티 피플] 380쪽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서서 있는 힘껏 돌을 던질 뿐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불필요하게 연민할 것 없이, 그저 이해하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팔을 휘둘러 돌을 던지는구나, 저 어르신은 저런 돌을 골라 오셨구나, 나는 어떤 돌을 어떻게 던질 것인지 고민하면서. 그렇게 가닿은 세계는 지금보다 덜 죽고, 덜 억울하고, 덜 슬플 것이다. 소설의 엔딩처럼 '아무도 죽지 않고, 유가족도 만들지 않고, 건물은 기울었을 뿐 무너지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왜 소설을 읽는가.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50번쯤 살아보려고, 나라는 인간을 힘닿는 데까지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오늘은 한 권으로 50번을 살다 왔으니 꽤 효율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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