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함께한 20개월
아이가 9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첫 일주일은 어린이집 적응을 위해 한 시간 정도 같이 시간을 보낸다. 마스크 착용은 당연하고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동행하는 학부모의 코로나 검사를 권유받았다. 선제 검사를 받으러 가는 길 버스정류장에 코로나 감염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작년 것인지 2020년 8월 집회 발 대유행으로 서울 156명 감염 상황에 '폭증'단어가 붙어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현재 2021년 8월 말 서울 확진자 500명 이상 전국 1400명 대의 상황은 '폭발'일까.
조리원 TV로 처음 접한 중국 우한 폐렴은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1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름이 바뀌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이를 낳으면 나와 내 주변의 익숙한 상황이 180도 바뀐다는 건 충분히 각오한 바였다. 계획했던 미래 속에 범세계적인 유행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단계 바뀐 개인적인 세계 위로 한 단계 더 덧붙였다. 3월 개학이 미뤄지고,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고, 거리두기 수칙이 일상화되고, 매일 확진자 수를 확인하게 되었다.
육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결말이 완성되면 마무리되고, 학교는 졸업하면 떠나고, 내가 원하는 것들 대부분 소유하거나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끝이 난다. 육아의 끝은 무엇일까? 아이가 제 손으로 밥을 지어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 학교를 졸업할 때?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 간다고 하면? 결혼? 아이가 완전히 내 품을 떠나는 날? 완전히는 없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아이의 부모고 아이는 영원히 나의 아이다. 육아는 끝없이 이어지는 결말 없는 이야기다.
팬데믹 선언 이후 1년이 지난 뒤 사그라드는 것 같던 확진자 수가 다시 1000명을 넘어설 때, 내가 느낀 것은 결말 없는 이야기의 피로감이었다. 이 상황이 끝이 나긴 할까?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희망을 갖기 시작한 인간들을 비웃는 듯이 바이러스는 델타 변이로 진화해 향상된 전파력으로 다시 세계를 후려쳤다. 아이가 뒤집기도 못 할 때는 어차피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안전하게 틀어박혀 있자는 마음이었다. 이제 집 끝에서 끝까지 뛰어다니며 남아도는 에너지로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 아이를 보며 놀이터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긴다. 아니 웃기지 않다. 전혀 웃기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발열과 호흡기 질환, 가까워진 죽음과 함께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길에서 당당하게 마스크를 내리고 활보하는 인간을 향한 분노,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려는 이기주의에 대한 경멸, 집 안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극도의 우울. 분노와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들은 보유한 힘이 너무나 강렬하여 다른 나머지 감정들을 겁주고 쫓아낸다. 거리두기 수칙을 위반한 사람들 뉴스를 보며 화를 내며 하루를 시작하면 아이가 웃으며 나를 보는데 따라 웃기가 어렵다. 오늘 내가 쓴 글이 좀 괜찮은 것 같은데 기쁘지가 않다. 한 달에 두 번 이렇게 브런치 글을 쓰면서 뿌듯하다가도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나의 보잘것없음에 우울해진다. 나의 감정들은 전부 어디로 다 도망가 버렸을까.
지금도 나는 어린이집에 가게 된 아이의 긍정적인 변화보다 감염에 대한 공포와 걱정, 별 것 아닌 일로도 일일이 콧구멍에 면봉을 집어넣어야 하는 이 상황이 귀찮고 피곤하다. 작년 아이의 요로감염으로 고열에 펄펄 끓는 아이를 들여보내 주지 않는 병원 앞에서 나는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을 향해 내가 아는 모든 욕을 퍼부었다. 돌잔치를 앞두고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서고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었을 때는 분노조차 느끼지 못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빼앗기고 빈 손으로 집에 갇혀 바라보는 이 이야기는, 결말이 존재할까?
소설 쓰기는 어려운 일이고 결말짓기는 훨씬 더 어렵다. 창작자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납득 가능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완결을 내지 못해 지지부진하게 끌려다니다 연중 된 수많은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삶에서 결말이란 곧 죽음이기에 내가 나의 결말을 확인할 수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완성된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일지 모른다. 작품을 쓰다 끝을 어떻게 낼지 몇 날 며칠을 끙끙대다 끝을 마주할 때 느끼는 쾌감이 있다. 사건이 해결되고, 원하던 것을 얻고, 때로는 잃고, 시작할 때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페이드 아웃-
지금 이 현실이 소설이라면 연이은 고구마 구간에 목 막혀 가슴을 치다 100% 효과가 입증된 슈퍼 코로나 치료제가 개발되어 뻥! 속을 뚫어주는 사이다가 등장하고 모두가 웃으며 마스크를 벗고 찬란히 빛나는 공원을 향해 손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항공 샷으로 엔딩-이면 대놓고 클리셰지만 클리셰니까 만끽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열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