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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18. 2021

존재와 시간이 자꾸 나를 찾아온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과의 술래잡기

처음으로 하이데거와 그의 철학이 궁금해진 계기는 사라 베이크웰의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이었다. 읽는 내내 ‘악, 세상에, 미친!’을 연발하게 만든 책이었다. 작년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살구 칵테일’은 내게 다양한 실존주의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사르트르, 보부아르, 후설, 레비나스, 그리고 하이데거, 어때, 너와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지 않니? 특히 하이데거는 호기심을 넘어 어떤 예감까지 들게 만들었다. 내가 여기에 깊이 발을 들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



하이데거는 철학의 위대한 혁명가였다. [존재와 시간]이 가장 '존재론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동떨어져 있는 우주론도 수학도 아니고 일상의 존재였다. 실용적인 주의와 관심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이다. 유용성이 사색에 앞서고, 다룰-준비가 손에-있음에 앞서며, 세상-내-존재 그리고 타자와-함께하는-존재가 홀로-존재를 앞선다. 우리는 대단히 복잡하고 풍부하게 얽혀 있는 세계 위를 배회하며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관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던져져'있다. 그러므로 그 '던져짐'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사라 베이크웰,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109쪽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커피잔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일상 속 사유, 세계 위에서 관조하기보다 세계 내에서 경험하는 철학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살구를 다 읽은 뒤 도서관으로 갔고,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을 검색했고,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 목차를 살폈다.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이나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의 근본구성계기 그리고 그 구성틀에 대한 시간적 해석을 앞서 윤곽지음'같은 제목들이 목차를 꽉 채우고 있었다. 목차만으로도 ‘악, 세상에, 미친!’이 튀어나오는 책의 본문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나는 하이데거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하며 책을 돌려놓았다.


올해 '죽음'을 주제로 한 세 번째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제목에 죽음이 들어간 책을 시작으로 그 책에서 언급한 다른 책을 읽고 책 말미의 참고도서를 또 찾는 방식으로 자료를 모았다. 죽음과 관련된 대부분의 책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한 번씩 언급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하며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설명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사망'과는 구분되는, 삶의 일부로서의 죽음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가 살아있는 한 여전히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실존에는 그 자체로 죽음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현존재는 죽음을 은폐하지 않고 죽음의 가능성을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삶을 정초할 수 있다.

- 이준일 [13가지 죽음 : 어느 법학자의 죽음에 관한 사유], 17쪽


생각해 보니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연구하는 책에서 죽음을 말한다는 건 필연적이다. 인간은 죽음을 열매 속 씨앗처럼 품고 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지금의 삶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 [존재와 시간]을 읽어야 소설 집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다소 과정이 생략된 결론에 납득하며 을지로에 새로 생겼다는 철학전문서점으로 달려갔다. 이왕 하이데거를 모셔올 거라면 정중하게, 본격적으로, 격식 있게 철학 서점에서 뵙고 싶었다.



도서관이 아닌 서점에서 만난 [존재와 시간]은 느낌이 달랐다. 그래, 이제 진심으로 나를 만날 텐가? 옥색 커버에 까치 출판사 특유의 투박한 디자인이 어우러진 표지의 [존재와 시간]은, 정말로 내가 이 책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나 고민하게 만들었다. 책을 살피는 내게 책방지기님이 다가와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으시냐 묻고 실존주의 철학 입문서들을 추천해 주시고 내년 '존재와 시간' 강독 수업이 열릴 예정이라고 알려 주셨다. 내 손에 든 철학책의 무게감과 다른 다정함에 좀 감동했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서 우선순위에 뒤로 밀려났다. 자료조사를 위해 읽어야 할 책이 쌓이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계속 나오고, 읽다 만 책들이 어서 당장 나를 읽으라며 책상 위에서 호통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읽어야지!'라는 마음이 조금씩 흐려지며 '읽을 수 있을까?'로 옅어지던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넷플릭스로 보고 있던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존재와 시간]이 예고도 없이 등장했다.


단순한 소품도 아니고 극의 주제와도 관련 있는 대사로까지 인용되며 꽤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1300년 전 지은 죄로 인해 월령수에 묶여 긴 세월 망자를 위로하는 달의 객잔을 운영하게 된 사장 장만월(아이유)과 99번째 인간 지배인으로 얽히게 된 구찬성(여진구)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귀신, 그러니까 죽음이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로 다뤄진다. 해당 회차는 구찬성이 귀신이 출몰한다는 도서관에 찾아가 호텔 손님으로 모셔가려다가 사망한 것도 몰랐던 자신의 친모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귀신이 빼지 못하게 막고 있던 [존재와 시간] 속에 구찬성의 어린 시절 사진이 들어 있었다. 탄생을 찬성받지 못했던 아이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어머니를 찾아왔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죽음과 삶의 중간에 갇혀 버텨 왔던 존재가 그를 안타까워한다.


사실 인간이 창조한 이야기 대부분은 ‘존재’와 ‘시간’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존재해야 하는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그려내는 형식들. 소설 역시 거칠게 요약하자면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 [존재와 시간]은 나를 찾아내고 말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읽을 책이 아무리 쌓여 있더라도, 브런치 매거진을 새로 파는 한이 있어도, 오독과 오해가 남발하는 읽기라도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첫 문장) 망각 속에 두지 않는다.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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