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wooRan Jan 12. 2022

아인슈페너와 다자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읽기 첫날


새해 목표로 매주 수요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기로 정했다. 처음 읽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장소로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카페가 적절하다. 아인슈페너를 주문하고 카페 가장 안쪽 작은 동굴 같은 자리에 앉았다. 책을 꺼내고 노트를 꺼내고 커피가 나오고 한 모금 마시는데 헐, 요즘도 헐을 쓰나, 아무튼 헐, 지금까지 마신 아인슈페너들을 모두 제치고 단숨에 1등 자리를 차지한 너란 아인슈페너는 어디에도 없는 커피.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누구도 하지 않을 일.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

제1장 존재물음의 필연성, 구조 그리고 우위

제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첫 장 제목만 읽었을 뿐인데, 이제 시작인데, 서둘러 최고의 아인슈페너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감탄할만한 커피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른다. 지금 내 앞의 책이 존재한다. 내 자리를 밝히는 탁상 등이 존재한다. 액자에 담긴 마티스와 벽에 붙은 호퍼의 그림이 존재한다. 그림들은 존재함으로써 무언가를 전달하는데 나는 인간이라 그림의 언어를 모른다. 두 마리의 새, 바다로 이어지는 문, 빛, 온통 빛, 빛이 있어 볼 수 있는 '존재한다'.


나는 방금 읽은 문장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럴듯하게 문장을 꾸민다. 존재라는 단어가 어설픈 문장을 약간 수습한다. '인간은 슬프지 않아도 슬프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같은 존재가 문장의 품격을 살짝 들어 올린다.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모든 인식함에, 발언함에, 존재자에 대한 모든 개개의 행동관계에,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개개의 관계맺음에 '존재'는 사용되고 있으며, 거기에서 그 표현은 '아무 문제 없이' 이해되고 있다. 누구나 '하늘은 푸르다', '나는 기쁘다'등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론, 18쪽


나는 오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커피가 마음에 든. 서술어가 '다'로 종결되며 나의 인식 역시 문을 꼭 닫는다.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내 현재가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게 다인가? 나를 잘 모르고 이 글로만 나를 접할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의 오늘에 대한 기록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정의를 내려버릴 수 있다. 지금 네 모습이 네가 맞긴 하잖아? 나는 너를 이해했어. 이해한다는 말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을 삼켜버린다. 머리 아프게 이해의 몰이해성을 따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머리 아픈 일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고, 나는 또 철학자의 존재를 함부로 단정 짓고 있다. 이게 다 무슨 쓸모가 있어?


나의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음으로써 나의 존재를 약간 높이기 위해서. 이 글은 지금 나의 감탄과 애정의 대상으로 등극한 아인슈페너 한 잔 보다 가치 있다 말하긴 어렵다. 아인슈페너는 누구시길래 이런 커피를 먼 한국에까지 남기고 가셨나? '아인슈페너 :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마부들이 피곤과 당 부족을 한 번에 떨쳐내기 위해 마시던 크림 커피에서 유래, 비엔나 커피라고도 부른다.' 6년 전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신 적 있다. 맛은 평범했지만 빈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신다는 상징성의 맛이 엄청났다. 나는 지금 삶을 잘 가꾸고 있다! 동행했던 언니와 웃으면서 상징의 기쁨을 나누었던 그 시간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정작 초점은 자허 토르테가 독차지 ㅋㅋㅋ


한 모금, 한 물음, 모든 물음은 일종의 찾아나섬이다(19쪽). 왜 이 책을 읽는가? 이 질문 자체가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읽는, 그러니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이유에 대해 답하는 책을 왜 읽는지 답하기 위해, 찾기 위해, 답을. 앞의 문장은 의미가 텅 비었다.


이러한 존재자, 즉 우리들 자신이 각기 그것이며 여러 다른 것들 중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라는 용어로 파악하기로 하자.

- 같은 책, 22쪽


현존재, 다자인 Dasein, 이 단어에 단단히 붙잡혀서 하이데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지! '이는 거기를 의미하는 다 da와 있음을 의미하는 자인 sein이 합성된 단어로, '거기에 있음' 또는 '거기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사라 베이크웰,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101쪽) 나는 여기에 던져져 있다. 내가 나를 저기로 던질 수 있을까? 내 100%를 정확히 묘사하는 데 성공한다면 내가 나의 존재를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물고기는 물을 창조하지 않고 그저 물에 있다. 나는 내 세계를 스스로 만들지 않고 그저 세계에 있다. 나는 있다.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며 있다. 내 식도가 넘긴 커피는 위장에서 소화되고 마스크 속 코가 걸러진 공기를 폐로 보내고 눈은 무의식적으로 깜박이며 보이는 것들을 뇌로 보낸다. 이것들 중 반 이상은 곧 잊힐 것이다. 방금 떠오른 수십 개의 문장 중에 기록되는 것은 단 하나-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다자인이 뭔데? 아인슈페너 같이 사람 이름처럼 부드럽게 들리는 단어인걸. 슈페너와 자인이. 당이 떨어지고 마부의 음료를 마신다. 고삐를 쥐고 앞으로 힘차게 달려가기 위해서.


20220112 , 서론 1 2절까지, 15-24, 카페 낟더쌔임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와 시간이 자꾸 나를 찾아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